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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저작시기 2008.02 |등록일 2008.02.10 한글파일한글 (hwp) | 5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목차

1. 서론
2. 본론
(1) 조선통신사의 정의와 파견 횟수
(2) 조선통신사의 규모와 구성
(3) 조선통신사의 행로
(4) 일본의 조선통신사 파견 요청 이유
(5) 조선통신사의 파견 목적
(6) 조선통신사의 활동과 영향
3. 결론

본문내용

조선은 1403년(태종3)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도 책봉(冊封)을 받아 조선, 중국, 일본간에 사대교린의 외교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幕府) 장군은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사절을 서로 파견하였는데, 이때 조선이 파견한 사절을 通信使, 일본이 파견한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通信)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일본에 왕래하던 사신은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등 다양하였는데 通信使만의 특징은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에게 파견되어야 하고 일본장군에 대한 길흉조사, 양국 간의 긴급한 문제해결이 목적이며 회례(回禮), 보빙(報聘)의 의미는 없었고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 앞으로 서계(書契) 및 예단(禮壇)을 가지고 가며 사절단은 중앙관리 3명 이하로 하며 通信使나 그에 준하는 국왕사(國王使)의 호칭을 써야 한다. 通信使라는 칭호 하에 파견된 첫 사절은 1413년인데, 이때는 도중에 중지되었고 제대로 된 첫 파견은 1429년의 사절단이다. 1510년(중종5) 삼포왜란(三浦倭亂)을 계기로 사절 왕래가 끊겼으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수호할 것과 通信使 파견을 끈질기게 요청하자 1590년(선조23)년에 通信使 일행을 일본에 보냈다.(이 때 파견한 通信使들의 두 반응에 의해 우리는 壬辰倭亂을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임난 이후, 1609년(광해군1)에 도쿠가와 막부의 국교재개 요청에 의해 기유조약(己酉條約)을 맺고 국교가 다시 이루어지자 1636년(인조14) 사절단부터 通信使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고, 1811년(순조11) 마지막 通信使가 파견될 때 까지 총 18회(임란 이후 13회)의 通信使가 파견되었다. 通信使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 장군의 습직(襲職)이 결정될 때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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