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서울의 문화사적과 사라진 명소

저작시기 2008.01 |등록일 2008.02.02 한글파일한글 (hwp) | 21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제목 그대로 서울의 문화사적 조사 모음입니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해설되어있는 전문자료입니다.
자세한 부분은 목차와 본문내용 참고하세요.
(목차는 너무많은 관계로 일부 생략하였습니다.)

목차

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 광주 풍납리토성(廣州 風納里土城, 사적 제11호)
○ 독립문(獨立門, 사적 제32호)
○ 삼전도비(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
○ 창경궁(昌慶宮, 사적 제123호)
○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 경희궁(慶熙宮, 사적 제271호)
○ 종묘(宗廟, 사적 제125호)
○ 전관교(전관교:살곶이다리, 사적 제160호)
○ 서울 사직단(社稷壇, 사적 제121호)
○ 우정총국(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 구 대한의원(大韓醫院) 본관(사적 제278호)
○ 약현성당(藥峴聖堂, 사적 제252호)
○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 구 벨기에영사관(사적 제254호)
○ 정동교회(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 운현궁(雲峴宮, 사적 제257호)
○ 명동성당(明洞聖堂, 사적 제258호)
○ 환구단( 丘壇, 사적 제157호)
○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 서울역사(驛舍, 사적 제284호)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사적 제243호)
○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 先史住居址, 사적 제267호)
○ 방이동 백제고분군(방이동 백제고분군, 사적 제270호)
○ 몽촌토성(夢村土城, 사적 제297호)
○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1호)
○ 봉황각(鳳凰閣,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2호)

생 략

본문내용

1. 문화사적
○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1호)
중구 남대문로 4가 29번지에 있다.
서울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남대문은 그의 속칭이다. 태조5년(1396)에 창건되었던 것이지만 현존 건물은 세종30년(1448)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평 53.79평, 정면 5간(間), 측면 2간의 남대문은 현존하는 한국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중요한 건물의 하나라 할 수 있다.

○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1호)
종로구 종로 6가 69번지에 있다.
한양 도서의 정동(正東)에 위치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속칭 동대문으로 불리운다. 이 문루는 태조 5년(1396)에 중수(重修)되었으나, 현존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개축된 것이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중앙부에 홍예문(虹門)을 만들고 그 위에 중층(重層)의 문루를 세운 점 등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수법이며 문밖으로 반월형의 옹성(甕城)을 돌린 것은 고종 6년에 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옹성 상부에는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다포계(多包系) 건물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서울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1394)만에 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태조는 그 이듬해 궁궐과 종묘·사직을 먼저 조성한 뒤에 도성축조도감을 열어 성 쌓기에 착수하였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태조로서는 성곽이 수도방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요, 강포한 것을 방어하고 민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태조는 강조한 바 있다.
성안과 성밖을 구별하여 쌓은 한성의 성벽은 돌이나 흙으로 북악산등을 타고 낙산·동대문·남산을 거쳐서 인왕산 산등성이를 둘리는 총연장 18,1km로 쌓아졌다. 당시 서울의 총 인구가 5만명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을 쌓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장정들의 수효는 4년간에 걸쳐 19만 7천여명에 이르렀다.
이 성에는 4대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청문을 두었다. 그리고 4소문으로는 동북에 동소문, 동남에 광희문, 서북에 창의문, 서남에 소의문을 두었다. 조선왕조 건설의 주역이었던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기본설계가 마련된 서울의 성벽은 둘레가 40리 남짓 되고, 그 후 세종 4년(1422)과 성종 10년(1479) 등 여러번에 걸쳐 중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관여하게 되면서 성문과 성벽을 하나 하나 허물어 버렸다.
현재 대문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과 동대문, 숙청문(1976년 복원)이며, 소문으로는 창의문과 광희문(1975년 복원), 동소문(1994년 복원)이며, 성벽으로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남산·인왕산 일대이다.

참고 자료

없음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