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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평전

저작시기 2007.12 |등록일 2008.01.12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1,300원

소개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바탕으로 쓴 김유신 평전

목차

(1) 화랑출신 김유신
(2) 진골출신 김유신
(3) 김유신의 전쟁사

본문내용

김유신이 자신의 정치 군사적 수완을 음모나 다른 일에 쓰였다면 통일신라는 없었을 것이며 김유신은 단지 졸장으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국의 통일전쟁사를 보면 그저 김유신뿐만 아니라 계백장군이나 연개소문 등 난세의 영웅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 유별나게 김유신이 이렇게 후대에 이름을 떨치고 강릉등지에서 아직까지 산신으로 모셔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삼국의 통일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통일전쟁에 김유신이 미친 영향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과 당나라군을 어느 정도 몰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인 것 말고 그러한 김유신이 어떤 출신이었으며 어떤 신분이었고 그 사람의 성격과 기본은 어떠했을까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화랑출신 김유신

먼저 그가 화랑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화랑은 무엇이었을까. 화랑은 귀족의 자제들의 모임인데, 자세히 알고 보니 화랑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랑도의 근원은 지역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청소년 단체로서 인류학적으로 보면 고대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마을 청소년들이 집회소를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성인이 되기 전에 여러 경험을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청소년 단체는 결합의 원리상 성(性)과 연령이 동일한 일종의 연령 집단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연령집단은 친족집단과 중앙 집권 체제가 발달하지 않을 때 활발히 활동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는 4세기 중엽 때 중앙 집권 체제의 틀을 잡기 시작하였고 종전의 청소년 단체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에 중앙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화랑도의 전신(前身)이라 불리는 원화(源花)제도였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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