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인문어학]한국 전쟁의 진실에 관하여

저작시기 2007.01 |등록일 2007.06.11 한글파일한글 (hwp) | 38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한국 전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한국 전쟁의 숨겨진 비밀과 진상, 그리고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는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참조하여 작성. 이 책의 내용이 한국전쟁의 진상을 알려주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조사나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목차

Ⅰ부 서장
1장 한국전쟁사의 역사
1. 정치적 논쟁과 공식 전쟁사
2. 여러 가설의 제출과 미궁
3. 미국 자료의 공개와 수정주의의 확산
4. 러시아 자료의 공개와 새로운 연구 경향
2장 전쟁의 개전 ․ 성격 ․ 형성
1. 개전을 둘러싼 논쟁의 해결
2. 전쟁의 성격 : 내쟁(內爭)같은 국제전쟁 ․ 외전(外戰)같은 동족전쟁
3. 전쟁의 형성
Ⅲ부 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
1. 정부수립 후 남북한의 적개심과 적대적 동화
1. 1948년의 동력학과 남북의 적대의식
<과도기로서의 1948년>
<폭풍 : 여수 주둔 14연대 반란>
<1948년의 동력학>
2. 남북한의 적대적 동화와 38선 충돌
<최고 지휘부의 적개심>
<군사 지도자들의 오해와 증오>
2. 무장충돌의 발화와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 구상 (1949.2 ~ 1949.4)
1. 1949년 38선 충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2. 무장 충돌의 방화와 정치적 배경
<진지 구축과 주요 충돌 지점>
<유엔한국위원단의 방한과 기사문리․고산봉전투>
<‘해주의거’ 사건>
3. 공산주의 삼각동맹과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구상
<스탈린의 결정: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과 조소 군사원조협정>
<중공의 동의와 한인부대의 입북>
<북한의 병력․무장 강화>
4. 북한의 옹진 점령 계획과 9월 공세 (1949. 8 ~ 1949. 10)
1. 북한의 공격 노선 전환과 옹진 점령 계획
<옹진 제2차 충돌과 북한의 옹진 점령 시도>
<8월의 북한: 공격 노선으로 급격히 전환>
2. 9월의 소련: 대남공격 가능성 검토와 노선 전환
3. 북한의 9월 공세설
4. 은파산전투(옹진 3차 충돌)와 연대급 38선 충돌의 종식
5. 소규모 충돌의 지속과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1. 정찰 과정에서의 소규모 충돌 지속
<고요가 깃든 38선>
<1950년 5월 : 북한의 38선 충돌 과장>
2. 북한의 공격형 군사력 완비
<정규군 병력·무장의 강화>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남파>
Ⅳ부 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
3. 개전 초기 옹진 전투Ⅰ
‘도발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주장
1. 내무성의 북침 · 반공격 보도
2. 포로들의 ‘북침’ 증언 검토
3. 옹진전투 승리의 진실
Ⅴ부 에필로그
1. ‘불의의 기습남침’과 ‘정보의 실패’
1. 만연한 북한의 침공 정보
2. 정보의 실패 : 잘못된 가정과 정보판단
3. 진정한 ‘불의의 기습남침’
2. 미혹된 진실 : ‘해주점령설’의 재검토
1. 한국의 설명 : 오보와 과장
2. 미극동군사령부 정보 자료의 혼란
3. 유도는 있었는가?
3. 혼돈 속의 진격 : 북한군의 실상과 허상
1. 공격사단들의 실상
2. 혼돈 속의 진격

본문내용

1. 정치적 논쟁과 공식 전쟁사
한국전쟁은 개전 직후부터 남북과 미국, 소련의 심리전, 선전전이 계속되었다. 남측과 북측의 선제 공격여부에 따른 전면적인 의견대립이 있던 가운데 개전을 확증해주는 명백한 증거들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경무대와 육군본부를 수색한 결과 중요 문서들을 노획했다. 이 문서를 통하여 북한 언론 및 소련, 동구권에서는 남한의 ‘북침’ 증거로 선전하였다.
유엔 주재 미국대표 워런 오스틴은 이 문서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이 유엔총회를 비롯해 모든 회의에 접수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이 노획한 문서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과대포장을 했거나 왜곡 인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소련 문서에도 등장하는 1949년 9월 30일 이승만이 공보고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의 내용이 북측에서는 북침 증거로 선전을 했지만 실상 49년의 편지가 50년 남한의 대북공격을 증명할 수 는 없었고, 단지 이승만의 대북 적개심과 호전적인 ‘북벌’, ‘북진’, ‘실지회복’에 관한 의지를 보여줄 뿐, 50년 6월 25일의 북침을 실증하지는 못했다. 특히나 50년 6월의 현장에서 이승만이 공격을 명령하거나 지시한 증거는 단 하나도 노획되지 않았다. 이는 남한에 의한 ‘북침’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참고 자료

<<한국전쟁>>, 정병준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