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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개혁 개방 노선과 천안문사건

저작시기 2007.06 |등록일 2007.06.01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발표문으로 작성한 것이어서 상세히 잘되어 있어요~~

목차

1.덩샤오핑 체제의 확립과 평화통일 정책으로의 전환
2.농촌과 연해 지역에서 시작된 개혁 · 개방
3.정치 개혁 논의와 당의 개혁안
4. 개혁 · 개방의 딜레마와 높아지는 사회불안
5.개혁파 내에서의 신권위주의 논쟁과 민주화 요구의 고양
6.제2차 천안문 사건과 무력진압
7.국제적 고립화와 냉전의 붕괴

본문내용

정치의 중대한 전환은 종종 예기치 못한 사건을 계기로 전개된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총서기가 타계하자 학생과 지식인들은 그를 추도하고, 찬양하는 집회를 개최했는데 이는 곧 민주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당국은 처음에는 묵인했지만, 5월 초순부터 운동은 정부관계자·기업가·일반시민·노동자를 포함하면서 확대되었고, 『인민일보』등 언론기관 관계자와 경찰관계 사람들까지 참가하기 시작했다. 규모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대 집회를 열었고 베이징 교통과 일상생활이 마비상태가 되었다.
5월15일~18일까지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했고, 덩샤오핑에 이어 자오쯔양과의 회담에서 그는 “우리는 제13회 당 대회 직후 중대한 결정을 했다. 그것은 중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덩샤오핑 동지가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라는 비밀결의를 누설하였다. 다음날, 「5·17선언」이 공포되고 덩샤오핑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5월20일, 계엄령이 시행되었고, 약 2주일 동안 당국은 진압행동에 나서지 않았지만 양자의 대치 상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사이 학생과 시민을 지지하는 해외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특히, 홍콩 시민과 학생들은 대규모 지원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당국의 자세가 강경해지자 지도자들은 일단 대학으로 철수할 것을 호소했지만, 새롭게 참가한 각지의 학생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가 없었다. 6월3일 새벽부터 “운동은 반혁명 폭동으로 변했다”라는 이유로 계엄령부대가 베이징으로 출동개시하고, 4일 내내 천안문 광장에 이르는 몇 개의 주요 도로 위에서 저항하는 학생 · 시민에게 발포해 이들을 쫓아버렸고, 셀 수 없는 많은 사상자들이 생겨났지만 덩샤오핑은 계엄령 부대의 간부를 위문 접견하면서 “이 풍파는 국제적인 대규모 정세( 화평연변 : 사회주의 체제의 평화적 전복 )와 국내의 소규모 정세(부르주아 자유화)에 의해 초래되었다”라고 격렬히 비판하고 자신의 처리를 정당화했다. 활동가 대부분은 체포되거나 국외로 도망했고 일반인은 침묵을 치킨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싹트기 시작했던 민주주의가 이러한 과정에서 철저히 뿌리 뽑혔다.

참고 자료

※ 야마코사토시.『중화인민공화국50년사』.일조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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