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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의 수취제도

저작시기 2007.01 |등록일 2007.05.31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조선왕조실록』중 「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 후기 수취제도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왕조실록』중 「정조실록」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동래의 수취제도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시대의 농민들은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해서 해마다 그 수확의 1할을 租라는 명목으로 田主에게 납부해야만 되었다. 물론 수조권자인 전주는 국가인 경우도 있고 개인이나 공공 기관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토지로부터의 수확량은 토질의 기름지고 메마름과 농작의 풍작․흉작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조를 징수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세종은 합리적인 年分九等法과 田分六等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 같은 큰 전란은 농토를 황폐화시켜 농경지의 감소를 가져왔고, 또 전란으로 말미암은 토지대장의 분실과 미정리로 대장에 누락된 토지가 늘어난 데다 각종의 면세지가 확대되어 국가의 세입은 줄어들고 농촌은 황폐하여 민생은 도탄에 헤매었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量田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전세 부과의 간편을

(1) 동래 부사 유당이 동래부의 네 가지 걱정에 대해 상소하다

동래 부사 유당(柳戇)이 상소하기를,

“본부(本府)에 네 가지 걱정이 있으니, 첫째는 입본(立本) 으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요, 둘째는 수표(手標)로써 왜인(倭人)과 무역하여 흔단(釁端)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군병(軍兵)의 거듭된 신역(身役)이요, 넷째는 관방(關防)의 마땅함을 잃은 것입니다.

이른바 ‘입본으로 백성을 해친다.’고 한 것은 공작미(公作米)가 1만 6천 석이고, 요미(料米)·어가미(魚價米)는 5천 1백 석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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