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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연방의 분열원인과 해체과정

저작시기 2006.10 |등록일 2007.05.21 한글파일한글 (hwp) | 27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유고연방이 해체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원인에 대해 각종 자료를 통해 자세히 분석한 보고서입니다.

목차

1. 유고내전의 발생원인 및 해체원인
(1) 대내적원인
- 정치적원인
- 경제적 원인
- 민족갈등
(2)대외적요인

2. 유고연방의 해체과정
(1)티토死前 분열의 조짐․상황 : 1960, 1970 年代
(2) 티토의 死亡 : 1980年代 상황
(3) 본격적인 연방의 분리 : 1991年~2006年: 1980年代 상황

본문내용

2. 유고연방의 해체과정

(1)티토死前 분열의 조짐․상황 : 1960, 1970 年代

▲ 란꼬비치 사건

60년대 코소보 내의 알바니아인들이 대규모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 때 ‘알렉산다르 란꼬비치’가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알바니아인들을 무차별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란꼬비치는 빠르띠잔 시절 티토와 동지 관계를 맺었던 “대 세르비아주의”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이 사건 이후 1966년 알렉산다르 란꼬비치 부통령은 티토의 관저를 도청한 사실이 발각되어 해임된다. 이 후,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소멸되고, 그 대신 크로아티아 민족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 “노메나 꿀라뚜라”(Nomena Kulatura)라는 신 계급이란 뜻의 신조어가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사회주의 등장과 더불어 평등한 사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또 다른 계급이 등장한다는 주장을 펴게 되는데 티토는 이것을 맹렬히 비판하게 된다.

▲ 1968년 코소보 내 알바니아인들의 시위 격화

코소보지역에서 알바니아인들이 압도적 수를 차지하게 된 것은 17세기부터였다. 1698년 코소보지역에서 오스만 터키제국의 통치에 저항해 세르비아인들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이후 이 지역에서 세르비아인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이 때 코소보지역의 알바니아인들은 충실한 이슬람들로 오스만 터키제국의 보호 아래 압도적 인구 구성비를 이루게 되었다. 그로부터 2세기가 흐른 후인 1875-78년 사이에 오스만 터키제국이 해체되면서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장악하려 침공했다. 그러나 코소보 지역 내 알바니아 민족주의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심각한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그 뒤 1912년의 발칸전쟁에서 세르비아는 성공적으로 코소보를 정복, 합병하고 많은 이슬람 알바니아인들을 추방했다.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들로 구성된 슬라브계 기독교인들은 1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코소보,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및 세르비아 남부지방에서 알바니아계 회교도들을 학살했다. 그로부터 2차 세계대전 시기 까지 코소보는 세르비아가 거느리는 내부 식민지와 같았다. 세르비아인 관리와 농부, 상인들을 코소보에 이주시켜 언어와 정치 제도 면에서 이 지역 다수 인종인 알바니아인들을 세르비아화하는 정책을 폈다.
2차 세계대전 중 처음엔 무솔리니의 영향 하에 놓였던 코소보는 1943년 경 나치 점령 하에 들어갔다. 이 때 많은 알바니아인들은 친나치 경향을 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서 나치의 SS부대로 조직되어 세르비아인들과 티토가 이끄는 공산 빨치산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들에 대해 잔혹행위를 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코소보인들은 1년여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다시 통합되었다. 세르비아 공산주의 정권은 코소보를 반식민지 상태로 통치하면서 차별정책을 통해 약 25만 명의 알바니아인들을 코소보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68년 폭력 시위로 저항했으며 이를 계기로 코소보는 1974년 헌법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획득하게 된다.

※ss부대 : SS란 Schutzstaffel[슛츠스파텔]의 약자로서 독일친위대를 뜻한다.

▲ 자그레브 사건 ; 크로아티아의 위기

배경 : 수세기의 걸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갈등관계가 기본적인 원인이긴 하나 공용의 세르보크로아티아어의 개발을 합의한 1945년 노비사드 협정을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부인하는 1967년 선언이 그 시발이었다.
크로아티아의 민족감정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격화되었는데 이러한 “크로아티아의 위기” 는 다민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각 공화국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연방국가의 기관, 그리고 정부에 있어서 세르비아인들의 우세를 힘들게 했다. 크로아티아는 공화국 재정, 특히 자신들의 실질적인 외화획득에 대한 보다 강력한 통제를 원했다. 이는 티토의 사적 개입으로 중단되었지만 크로아티아인들은 역사적, 경제적 비평을 넓혀갔고, 최종적으로 크로아티아 공산당 연맹을 통해서 이의를 표명하였다. 문제는 당국이 크로아티아인들에 있어서 모든 사회, 경제, 정치적인 문제들을 민족 감정이 반영된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인간의 말다툼이 빈번히 발생했다. 마띠짜 흐르바츠카(Matica Hrvatska ; 크로아티아 학술원)는 1972년에 발간이 중지되었으나, 그 인원을 늘리고, 다른 많은 것과 함께 유엔에서의 독립된 크로아티아의 회원권을 주장했다. 자그레브 대학의 학생들은 로마 카톨릭 민족주의자 학생을 총장으로 선출하였고, 크로아티아 지식계층에 의해 집단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71년 11월 말 자그레브 대학생들의 동맹 휴업이 일어나면서, 가두시위로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경제, 문화, 특히 언어에 있어서 크로아티아어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당시 경제적부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높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세르비아에 많게 분배하는 것에 대하여 크로아티아 인들은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또한 불만의 요인의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시기가 부절적하여 실패로 돌아간다.
연방해체와 외세개입의 가능성이 보이자 티토는 강경수단의 필요를 느끼고 12월 상임간부회의를 통하여,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 내 규율을 강화할 것을 결의하고, 어떠한 민족주의 시위를 막론하고 탄압할 것을 결정한다.

▲ ‘쁘레드세드니슈뜨보’의 제정
- 집단 대통령제

‘자그레브의 봄’ 이 후에 도입한 집단대통령제는 각 공화국, 자치주당 1명씩 대통령을 두어 총 8명의 각 공화국대통령이 연방 대통령을 윤번으로 담당하는 제도로서 이는 티토의 시대가 최종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티토는 6개의 각기 다른 특색의 공화국을 강력한 유고슬라비즘으로 ‘종교’나 ‘민족’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는 정치적 민족주의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티토의 뒤를 이을만한 눈에 띄는 후계자가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해 온 빠르띠잔 세대를 대신할 만한 공부 경험이 있는 전 후 세대 지도자가 없었다. 당시 빠르띠잔 세대는 전시경력으로 정치 요직을 차지하고 다음 세대의 승진 기회를 막음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하였다. 티토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단대통령제를 입안하였지만 이 후 연방이 흔들리자 공화국 간의 이견을 조정할 강력한 장치를 갖지 못함으로써 해체가 가속화되었다.

▲1974년 新 헌법창안

가까스로 자그레브 사건을 수습한 티토는 자신의 사후에도 유고슬라비즘을 공고화하여 이와 같은 사태를 대비하고 유고연방의 기틀을 유지할 것과, 유고슬라비즘 구축을 위한 크로아티아인 등 여러 민족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집단대통령제를 도입하고 1974년 헌법을 재정비한다. 당시 세르비아는 진정한 유고슬라비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함을 역설하였고, 반면 크로아티아와 여러 민족들은 지방 분권을 통한 여려 민족들의 단결이 유고슬라비즘의 구축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하였다. 티토는 이러한 양자 간의 의견을 절충한 조치의 일환으로 연방정부는 각 공화국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공화국 간의 평등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는 1974년 헌법을 발표하여 6개의 공화국에 군사, 외교 등 핵심 부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권한을 공화국들에게 이양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최고의 중재자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결국 티토의 권위만이 구유고연방의 결속을 유지할 수 있었다.

- 헌법의 특징

․지나친 분권화와 자유화가 유고슬라비즘을 해칠 수 있다며 레닌의 이념인 “데모끄라뜨스끼 쩬뜨랄리잠

참고 자료

∘인문사회과학연구 제13집 사회주의 연방의 해체에 관한 비교 연구
-소련,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중 유고모델을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연구 14집 (공주대학교 사범대 국민윤리교육과 김경숙)
∘La legenda militestro(서적 - 티토 일대기)
∘naver오픈백과 -키워드 유고슬라비아연방
∘http://en.wikipedia.org/wiki/Yugoslavia
∘http://www.kida.re.kr/- 한국 국방연구원(세계분쟁정보)
∘국가자본주의의 위기와 민족문제의 폭발 :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정치경제학
1993.6.7 (홍종호 교수)
∘코소보분쟁에서의 미국개입에 관란 연구-정치학 석사 학위논문(지도교수 백봉종)
∘보스니아기사 사진자료-AP통신(미국 연합통신)
∘코소보사태 기사-한국경제세계 1999년 3월 26일. 27일자
∘유고슬라비아 분쟁이 남긴 교훈 : 힘의 논리 통용되는 냉엄한 국제적 현실
-국방부 국군홍보관리소 안보논단 (국방대학원 교수 서의남)
∘나토의 유고공습과 국제질서 그리고 햇볕정책의 장래(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홍현익)
∘중앙대 정치외교 http://218.152.194.70/down/기구론.hwp <NATO in Kosovo & Ir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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