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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과정 및 그 결과

저작시기 2007.04 |등록일 2007.05.18 한글파일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병자호란

목차

1. 머리말

2. 병자호란의 발생원인
(1) 인조반정
(2) 이괄의 난
(3) 정묘호란 3. 병자호란
(1) 배 경
(2) 경 과

4. 병자호란의 결과
(1) 장수나 관료의 공과에 관한 문제
(2) 속환문제
(3) 효종의 북벌계획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1636년 (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 청나라의 싸움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임진  정유왜란이 끝난 지 40년 만에 있는 병자호란에 우리 정부는 청나라에 맥없이 항복하고 전쟁이 끝났다. 이는 임진왜란과 같은 외적의 침략을 받아 미증유의 국난을 겪고도 역사적 반성을 하지 못한 결과임에 지내지 않는다. 병자호란은 당신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그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을 통하여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병자호란의 과정 및 그 결과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자.

2. 병자호란의 발생원인

(1) 인조반정
병자호란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하려면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인조 1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인조반정이라 한다. 인조반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조선의 앞날은 결코 밝지 못했다. 인조반정의 세력은 명나라를 섬기고 새롭게 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여진족을 배척했는데(친명배금), 이처럼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외교정책은 조선 강토를 또 한번 전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게 된다.

(2)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 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고하고 2등 공신 밖에 되지 못하였으며, 외지인 평안도 영변으로 부임하게 되고,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 있게 되자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아들 전이 누명을 쓰고 무고죄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아들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켰다. 인조는 공주로 피난을 갔고 한양은 이괄의 반란군에게 점령당했다. 이괄의 난은 도원수 장만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화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정충신의 추격을 두려워한 부하들이 이괄과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반란은 평정 되었지만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여,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촉구하여 정묘호란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9』「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국사편찬위원회 1994
한국사이야기 『국가재건과 청의 침입』 이이화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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