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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과 농민운동

저작시기 2007.03 | 등록일 2007.05.10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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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면서

★동학 창단당시의 사회상황

★전봉준의 등장과 고부민란

★민란에서 농민전쟁으로

★1차 농민전쟁의 궐기

★외세의 개입과 타협

★지방권력의 체험

★2차 농민전쟁의 궐기의 성격

★2차 농민전쟁의 경과

★전봉준의 공판과 처형 과정

본문내용

★들어가면서
전봉준은 1855(철종 6)∼1895(고종 32)까지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였다. 본관은 천안. 자 혹은 초명은 명숙, 호는 해몽이었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동학에 입교하기 전까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마지기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이었으며,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일로 생계에 보태는 등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동학에 입교, 동학에 접주가 되면서 전봉준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전봉준과 동학은 상호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1조는 전봉준을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공사관 기록 등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동학농민운동에서 보이는 전봉준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 창단당시의 사회상황
1876년의 개항,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 등을 계기로 일본과 구미의 자본주의 열강세력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고, 봉건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1860년에 창교되어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은 개항 후인 1878년경에는 삼남지방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교단조직을 크게 활성화하였다. 이는 개항 이후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진 농민들이 대량으로 교단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교단의 성격도 농민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교단에는 신앙의 힘에 의한 지상천국의 실현과 동학의 포교 그리고 개인적 구제에 치중하는 잔반층 중심의 교단지도층과, 물리적 실력행사도 거리끼지 않고 자신들의 생활조건의 개선, 나아가 농민층의 사회적 해방까지 희망하는 농민층 중심의 하층신도층이라는 두 흐름이 형성되었다.
★전봉준의 등장과 고부민란
하층신도층의 지향을 주된 동력으로 하되 상층지도층이 이끄는 교조신원운동이, 1892년 10월 공주에서, 11월 삼례에서, 1893년 2월 서울에서, 3월 보은에서, 네 차례 개최되었다. 이들 운동은 모두 실패하였으나, 서울집회 이후 하층신도층의 일부세력은 더욱 과격화하여 1893년 3~4월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 교단이 이끄는 교조신원운동과는 별도로 집회를 열고, 교단의 운동을, 반외세, 반탐학의 방향에로 기울게 하려고 하였다. 이 세력집단의 지도자가 전봉준이었다. 전봉준은 1890년 무렵에 동학교단에 입교하였고, 1892년에는 고부접주로 임명되었으며, 1893년 3,4월에는 금구집회를 주도하는 등 하층신도들과 농민들의 입장에서 보다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봉준은 고부민란을 지도하게 되었다. 민란의 목적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응징과 고부읍정의 시정이었다. 이 민란은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 설득과 안핵사 이용태의 야만적인 탄압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전봉준에 관한 일본공사관 기록),(국사편찬위원회 전봉준에 관한 매천야록),(전봉준 평전, 신복룡,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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