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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경복궁을 다녀와서

저작시기 2006.12 |등록일 2007.04.1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22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경복궁을 다녀온후 경복궁의 전반적인 소개와 경복궁의 역사, 내부소개, 경복궁의 수난, 관련사건, 수난이유, 복원사업,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본 문화유산의 의미, 각조원들의 느낌점
위주로 썼습니다.
사진첨부및 조원들이 합심해서 쓴 생각들로 인해 점수를 잘받았던 리포트입니다
많이 애용하세요

목차

■경복궁의 전반적 소개
1.경복궁의 역사
2.경복궁 내부소개

■경복궁의 수난
1경복궁 관련사건
2경복궁의 수난이유

■경복궁 복원사업

■의견 -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서 본 문화유산의 의미
※소감

본문내용

Ⅰ. 경복궁의 전반적 소개

경복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이궁은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전소(全燒)되었으며, 그후 왕궁으로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중건되지 못하였다가 고종 때 중건되었다. 고종2년에 착수한 경복궁 중건은 4년에 걸쳐 계속된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이 고역을 도맡아 진행시켰는데, 국고가 탕진될 만큼 대공사였다.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관료들과 부자들에게서는 물론, 백성들에게서까지 원납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결과적으로 통화증발을 야기하는 등 경제의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시킨 경복궁은 궁성의 길이가 1,762간에 달했으며, 문은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의 사대문이 중건되었다. 궁성 내에 경영한 전각은 합하여 7,225간있고, 궁성 밖에 경영한 후원에는 489간의 전각이 들어섰다. http://gbg.cha.go.kr/ [경복궁 홈페이지]


1. 경복궁의 역사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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