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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중국사 (수나라~백련교도의난)

저작시기 2007.01 |등록일 2007.04.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900원

소개글

수나라에서부터 백련교도의 난까지

시대의 문제도 같이 대략적으로 살펴봄

목차

<수나라>

<문제>황위의 찬탈

<운하>

<당나라>

<안사의 난>

<균전제>

<조용조>

<이세민 600~649>.

<송나라>

◎ 남송의 발전

<왕안석1021 중국 장시 성[江西省]~1086>

◎ 사회와 문화

<성리학>

<요遼>

<금金>

<서하 西夏>

<원나라>

◎ 정치

◎경제

◎ 문화

<백련교도의 난 白蓮敎徒 ―― 亂>

본문내용

<수나라>
581년 제위에 오른 양견은 남북조시대의 오랜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40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했다. 양견은 북주를 세운 우문태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북방의 무천진(武川鎭)에서 군인생활을 하고 선비족과 통혼할 정도로 북방민족의 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북조 후기에는 선비족과 한족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대립했는데, 북주는 고대 〈주례 周禮〉의 이데올로기를 관제 등에 채택하고 선비의 토착화를 진전시키는 동시에 한족 관료를 중용하여 두 민족을 체제적으로 융합시키려 했다. 이같은 북주의 노선을 계승한 수는 더욱 의식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고, 중국 전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선비계의 호성(胡姓)을 폐지하고 양견 스스로 후한 이래의 명족인 홍농(弘農) 화음(華陰) 양씨(楊氏)의 후예라고 선전했다. 양견은 대흥성(大興城)을 수도 장안으로 이름지었다. 또한 개황율령(開皇律令)을 반포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관료지배를 강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북방 돌궐(突厥)에게 이간책을 써서 내부분열을 꾀했다. 또 명목상 독립상태에 있던 양쯔 강 중류의 후량(后梁)을 정복하고 이어 강남에 있던 남조 최후의 왕조 진(陳)을 공격했다. 왕자인 진왕(晉王) 광(廣:후의 煬帝)을 총사령으로 한 수의 수십만 대군은 문약한 진을 곧 패배시키고 589년 천하통일을 실현했다. 천하를 통일한 뒤 문제(文帝), 즉 양견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을 중앙집권화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했으며 백성을 철저히 관리했다. 호구 조사를 강행하여 백성을 모두 호적에 등록시켰으며, 수적법(輸籍法)을 실시해서 조(租)와 조(調)를 효과적으로 징수했다. 또한 남북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해 민생안정을 꾀했으며, 관창(官倉)의 비축을 늘려 국가의 부를 충실히 했다.
양제는 황태자를 실각시키고 아버지 문제를 시해한 뒤 제위에 올라 대외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토욕혼(吐谷渾)․임읍(林邑:찬파의 중국 이름)․유구(流求) 등지에 원정대를 보내고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에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입공(入貢)을 강요했다. 또 남녀 100만 명 이상을 차출하여 대운하를 만들고 뤄양 서쪽의 대리궁(大離宮) 외에도 운하를 따라 몇 개의 궁전을 지었으며 이로 인한 원성에도 불구하고 다시 무모한 고구려 원정을 강행했다. 수의 대군은 고구려의 끈질긴 저항으로 거의 괴멸되었다. 제2차 원정에서는 도중에 일어난 반란으로 전국은 다시 동란에 휩싸였다. 이 동란중에 돌궐 방위의 요지인 태원(太原)의 유수(留守) 이연(李淵) 부자도 반기를 들었다. 각지에서는 관료․귀족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전국은 군웅할거 상태가 되었다. 이연은 돌궐의 원조를 받아 가장 먼저 수도 장안을 제압하고 우위에 섰다. 618년 놀이를 위해 행차중이던 양제가 친위군의 반란으로 시해되자 이연은 곧 제위에 올라 당을 세웠다. 수는 급격한 중앙집권화와 외정(外征)의 실패로 38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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