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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민족운동의 분화

저작시기 2007.01 |등록일 2007.03.30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26페이지 | 가격 5,000원

소개글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분화 양상입니다.

목차

1.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분화
2. 부르주아 민족운동
가.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분화
*김윤식 사회장 사건
나.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민족개량주의)
*이광수 민족 개조론, 물산장려운동
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비타협적 민족주의)
3. 사회주의 운동
가. 사회주의 사상 전파의 배경
나. 사회주의 운동가의 활동
다.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
라. 국외의 사회주의 운동
마. 조선공산당의 4차 당재건운동
4. 신간회운동
가. 민족유일당 운동(통일당 운동)의 배경
나. 신간회 결성 배경
다. 조직의 성립
라. 역사적 의의
5. 아나키즘 운동
가. 아나키즘의 출생
나.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
다. 아나키즘의 우리나라 도입
6. 상해임시정부(외교독립론)
가. 노선의 대립과 분화
7. 대중운동
가. 노동운동
나. 농민운동
다. 청년학생운동
라. 여성운동

본문내용

1.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분화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한 때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일본의 힘에 밀려 3․1운동이 민족해방을 이룩하지 못한데다가 기대를 모았던 미국 등 열강의 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운동 세력은 이러한 정세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활로를 찾아 분화와 통합을 거듭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윤식 사회장 사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 연재, 10월 러시러시아혁명 등은 각 세력의 분화와 대립의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어떤 세계관에 입각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인가, 그리고 독립 후에 어떠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부르주아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으로 분화하는 양상을 띠었다.

*김윤식사회장사건
<배경>
-워싱턴 회의(1921.11.11~1922.2.6)에 대한 기대감 상실
“태평양 문제를 둘러싸고 미일의 갈등이 격화되던 상황에서 개최된 워싱턴회의에서 조신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에 관한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회의는 오로지 일.영.미 3대국이 서로 충돌없이 영원히 평화의 복리를 향수하기를 위한 절차적 행위에 불과했다. 또한, 일본은 이미 세계 3대 강국의 하나가 되었고, 그로 인해 조선의 독립은 당분간 절망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현실 속에서 조선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교육, 산업과 같은 문화적 시설에 열중하여 실력양성에 진력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
총독정치의 상대적 안정화라는 국내적 상황은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 공간을 넓혀나가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김윤식 사회장 사건의 경과>
-‘김윤식사회장위원회’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이미 1922년 1~2월 일련의 시설을 통해 일제의 틀 안에서 문화향상, 경제발전 ,권리신장 등 실력양성을 통한 문화운동의 전개를 표방하고 있었다. 또한 특히 이 시기 주목되는 점으로는 이들이 대동단결과 정치운동을 빈번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장을 주도하고 있던 시기인 1월 30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정치는 인생생활의 전부를 지배하며, 정치를  문화의 발달과 민중의 문화적 향상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문화운동자와 함께 정치운동자가 동일히 필요하며, 이제 위대한 정치가적 인물이 조선사회에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폈다. 또한, 송진우는 “이 경성에야 우리 70여명 위원을 제한 외에 여론을 일으킬 능력을 가진 자가 누가 있느냐”라는 말로 김윤식사회장위원회 집행부의 위상을 평가하고 있었다. 즉,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정치세력화를 통한 정치운동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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