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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벽란도는 제 1의 무역항이었다

저작시기 2007.03 |등록일 2007.03.13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22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20page정도의 분량입니다.
적당한 분량으로 참고자료하시기에 좋을거예요^^

벽란도는 고려시대의 제 1의 무역항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많은 자료들을 모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 제목: 고려시대의 벽란도는 제 1의 무역항이었다.

1. 수도인 개경에서 가까운 곳이다.
(1). 지리적 요건의 특징
(2). 고려의 중심 항로.
(3). 물이 깊어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2. 송, 일본의 중간 위치로 교통이 편리하다.
(1). 송과 일본의 위치로 주요 교통점.
(2). 고려와 송과, 일본 무역.

3. 당시는 거란, 여진 때문에 뱃길을 이용하여 벽란도에서 무역이 성행하였다.
(1). 고려와 거란의 무역에서는 조공무역의 비중이 컸다
(2). 여진과는 공무역 사무역이 활발.

4. 그밖의 여러 나라들이 드나들었다.
(1). 고려와 아라비안의 무역.
(2). 고려와 금과의 무역.
(3). 고려와 원과의 무역.

5. 개성상인은 현대의 세일즈맨의 원조이다.
(1). 개성의 궐력권을 쥔 개성상인들.
(2). 개성상인의 활동과(공), 그들의 업적.

6. 결론.

본문내용

고려 말기 여.송 양국 사이에 국교가 끊어진 다음 예성항 언덕 위에 있던 벽란정이 없어지고, 예성항도 국제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면서 예성항을 벽란도로 혼동해 불렀다고 한다.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碧瀾亭)을 따라 벽란도라고 이름 하였다.)
<고려 제1의 간선로 - 서경으로, 그리고 벽란도로>

선의문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를 만난다. 벽란도는 송나라의 사신이나 상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멀리 동남아ㆍ아라비아의 상인들도 내왕하였던 개경의 해상관문이자 국제무역항이었다. 이곳이 이렇듯 붐비게 되자, 조정에서는 벽란도에 외국의 사신이나 상인이 머물 수 있도록 객관을 짓고 이름을 ‘벽란정(碧瀾亭)’이라고 하였다. 예성강의 ‘예성(禮成)’이라는 명칭도 고려에서 송나라에 조회할 사신을 보낼 때에 모두 이 곳에서 배를 띄웠다는 데서 기원하였다 한다.


벽란도의 위치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다. 즉,〈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벽란도는 개성선 의문 서쪽에 있었고 예성항은 그 남서쪽에 있었다고 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예성항이 벽란도의 하류에 있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벽란도는 예성항 상류의 나루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북도 개풍군(開豊郡) 예성강 하류에 있던 나루터. 황해도 고달산(高達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를 따라 흘러 황해로 들어가는 예성강은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물살이 빨라 위험 특히 고려 중기에는 송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남양(南洋)과 서역 지방의 상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는데 벽란도는 이러한 국제무역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참고 자료

- 박기현, 고려 이야기, 늘푸른 소나무, 2000년
- 윤명철,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사계절, 2000년
- 이병희,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고려), 솔출판사 2002년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청년사, 1997년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청년사, 1997년
- 교수님꺼
- 서울경제 2006.04.06 뉴스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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