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신학]신학적 발상의 전환점, 슐라이어마허

저작시기 2007.03 |등록일 2007.03.08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4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들어가는 글
I. 생애 :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어떤 사람인가?
II. 18-19세기 시대정신과 슐라이어마허
III. 원 저작을 통해 살펴본 슐라이어마허의 사상
VI. 결론 :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의미

본문내용

슐라이어마허는 1768년 3대째 개혁교회 목회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는 4대째 개혁교회 목사가 되었다. 1778년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생활과 예배에 접촉하게 되면서 깊은 감화를 받는다. 하지만 개혁교회 목사의 신분으로 모라비아 교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는 그 공동체의 일원이었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신앙을 갖도록 독려했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과 수련을 위해 모라비아 교도의 형제교단의 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했다. 1783년 슐라이어마허는 형제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기숙학교인 괴를릿츠 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802년 슐라이어마허가 친구 엘레아노레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때 슐라이어마허는 잊을 수 없는 결정적인 종교적 회심을 경험하였고, 보다 높은 세계를 자각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서 그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라비안 교도가 되었다. 예수에 대한 격렬한 사랑과 헌신, 젊은 친구들과의 공동 연구, 철저한 경건 훈련과 더불어 인본주의, 라틴어, 헬라어를 학습하게 된다. 이 학교에 들어간 이후 다시는 그의 부모님을 보지 못했고 수많은 편지만 주고받았다.
1785년 슐라이어마허는 다른 동료 10명과 함께 형제단의 신학교가 있는 바르비로 도보 여행을 하기 위해 괴를릿츠를 떠난다. 바르비의 학교는 전형적인 경건주의적 방법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포기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중시했고 순수문학이나 철학을 읽기 위해선 엄격한 검열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근처 할레 대학의 계몽주의 정신과 인문주의 운동은 격리생활을 하는 바르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적 종교열과 계몽주의 신학과 대립을 경험하면서 세계관의 충돌과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된다.
마침내 1787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할레대학 신학과에 입학하고 특히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를 비롯한 고대 문학과 철학을 열심히 연구했다. 2년 뒤 할레를 떠나 드로센에서 공부를 계속하며 특히 광범위한 철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영향을 받아 종교보다 윤리를 특별히 우위에 두었다. 이 시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영적으로 가장 침체되며 회의와 체념에 사로잡혔다. 그는 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근시인데다가 염증까지 있었고, 만성 위장병을 평생 앓았다.
1790년에는 아버지와 삼촌의 강권으로 목사 고시에 응시한다. 그리고 아버지 친구의 추천으로 슐로비텐에 있는 도나 백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지적으로 영적으로나 아주 건강해지게 된다. 백작 가정의 화목하고 신앙적 분위기 속에서 그는 행복한 공동생활과 자유, 인간 사이의 다정하고 친밀한 사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렇게 4년을 지내다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란츠베르크에서 목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796년부터 1802년 동안 베를린의 Charite 병원의 원목을 맡았다. 이 때 그는 헨리에테 헤르츠, 슐레겔과 우정을 나누며 낭만주의 지식인들과 교제하기 시작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매력적이며 영리한 화술가였다. 이 친구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심지어 신앙에 거북함을 표현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설교직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종교자체에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다. 이들을 염두에 두고 1799년,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을 집필한다.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