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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정한론

저작시기 2007.01 |등록일 2007.03.0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6페이지 | 가격 500원

소개글

정한론에 대한...

목차

1. 19세기 후반의 한,일관계

2. 불평등 조약과 침략의도

3. 근대일본의 한국편견

4. 정한론의 대두 배경

5. 정한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

6. 정한논쟁의 이해체계

본문내용

일본이 한국을 정벌■침략하고자 기도한 것이 보통 대원군의 일본 서계 거척사건 이후라고 일본인이 쓴 대부분의 논저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일본의 편견토성이인 한국인식의 오류에서부터 일어나고 있는 철두철미한 뿌리깊은 침략 수법에서 울어 나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정한론의 논쟁은 메이지유신 훨씬 전인 에도막부 말기에서부터 그 뿌리 찾을 수가 있는데 다른 의견을 보면 이미 임란 이후에 끊임없이 조선의 침략논쟁이 그 모습과 내용들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제기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메이지유신 정부가 들어서면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침략의 맥락은 고대로부터의 한국 멸시관에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로서 일본의 한국정벌론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왕정복고의 통고서 거척사건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무례를 구실로 정한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메이지 초년에 많았었다. 게다가 보신전쟁이 끝남과 함께 당시 일본 국내에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과시하는 무사들이 넘치고 있었다. 이러한 무사들을 조선으로 보내면 국민들의 관심을 밖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키도 등도 1868년 12월경에는 이와쿠라에게 ‘조선을 칩시다’ 라고 진언했다. 이밖에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선구자인 하시모토, 요시다 그리고 일본육군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오오무라등도 군비를 서둘러 강화하여 조선,유구,대만,캄챠카를 원정할 것을 주창한 바가 있다. 즉 전부터 있었던 대외침략의 기운이 유신 직후의 사회적 상황과 메이지 정부 내의 정파싸움과 맞물려 크게 대두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일본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한국인식> 현음사. 정재성. 1998
<근대일본정치문화사 1, 2> 시사일본어사. 황성규■한태호. 1986~1967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정한론의 계보> 자유포럼. 한계옥.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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