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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저작시기 2005.01 |등록일 2007.02.2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3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전공 레포트라 1주일 꼬박 걸려 쓴 것입니다.

목차

<머리말>

<본문>
1.아편전쟁의 배경
1) 광동무역체제(廣東貿易體制)
2) 아편 전래와 은의 유출
3)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
4) 임칙서의 아편 대책
2.아편전쟁의 경과
1)전쟁의 시작과「천비조약(川鼻條約)」
2) 청조의 대영 선전 포고와 광주화약(廣州和約)」의 조인
3) 영국의 침략 전쟁 확대와 청조의 항복
4) 아편전쟁의 패인
5) 남경조약(南京條約)과 일련의 불평등 조약의 체결
3. 제2차 아편전쟁
1) 조약 개정과 애로우호 사건
2) 영․프 연합군의 북상과 「천진조약(川津條約)」
3) 영․프 연합군의 북경 점령과 북경조약의 체결
4) 북경조약

< 맺음말 >
<부록 : 연표>

본문내용

< 머리말 >

중국근대사의 기점을 제 1 차 아편전쟁으로 잡는 것은 중국인학자나 서양인학자 사이에서 대체로 일치되어 온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최근에 이르러 일부 논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명말(16C후반) 혹은 명청교체기(17C)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잡아야 한다는 시각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제 1차 아편전쟁을 기점으로 삼는 경우, 대부분의 서양인학자들은 이 ‘서구의 충격’으로 ‘전통적’중국은 비로소 정체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변화의 시가기 시작되었으며, 국제적 고립상태가 종식되었다는 인식을 보이는 한편, 중국인 사학자들의 경우에는 이때부터 제국주의 침략사가 시작되며, 따라서 이후의 중국사회는 ‘반식민지 ․ 반봉건사회’로 전락했다고 본다. 이들은 1차 아편전쟁을 획기로 보는 점에서는 일치하되 외인(外因)의 역할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서로 상반되고 있다.
16세기 후반, 혹은 17세기의 명청교체기를 근대사의 기점으로 잡는 경우, 혹자는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맹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그 논거로 삼기도 하고, 혹자는 이 시기가 내부적으로는 만주족이 흥기하여 청조가 성립되었으며, 외부적으로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해 서양인이 도래함으로써 서양학문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 따라서 19세기에 서양의 충격과 효과가 특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1․2세기 전에 진행되기 시작한 변화과정이 확대, 강화된 것일 뿐이라 한다. 이는 내인(內因)을 훨씬 중요하게 보면서 명말 이래의 도시화 ․ 상업화 ․ 화폐경제화 경향이라든가 신사(紳士)의 증가, 영토와 인구의 증가 등의 여러 현상을 보다 근본적인 변화로 인식한다. 따라서 제 1차 아편전쟁은 사회 전체의 진보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외교사 ․ 무역사, 광동이나 연해지방의 사회경제사 ․ 지방정치사와 관련되는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중국근대사의 기점과 관련하여 내인과 외인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중국근대사의 독자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내인을 중시하는 시각은, 제국주의 역할의 축소 경향과 관련하여 결국은 자신(서양인)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묘한 지적 위장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편견 속으로 타락할 가능성도 있지만, 기존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시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여 제 1차 아편전쟁이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와 의미가 축소될 수는 없고, ‘반제반봉건’이라는 중국근대사의 ‘과제’와 관련하여 제 1차 아편전쟁이 중국을 ‘반식민지 반봉건’상태로 전락시킨 질곡으로서 기능한 측면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제 1차 아편전쟁이 ‘획기’로서의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참고 자료

신승하, 『중국근현대사① 근대: 개혁과 혁명(上)』, 대명출판사, 2004
중국사연구회, 『중국근대사』, 청년서, 1990
서울대학교 동양사연구실 편, 『강좌중국사Ⅴ』, 지식산업사, 2005
박원고 역, 『중국근현대사』, 지식산업사, 2004
천성림 역, 『중국근대사』, 예전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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