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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7.01.01 한글파일한글 (hwp) | 5페이지 | 가격 500원

소개글

사람이란 무엇을 하지 못하게 억압을 받게 되면, 그것을 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유신체제로 인해 자유를 억압받던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은 더욱 더 커져가게 된다.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서거하고 유신체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때, 사람들은 그 당시를 서울의 봄이라 일컫게 된다. 그 시기는 이미 겨울에 더 가까웠는데 왜 서울의 봄이라 부르게 되었을까..사람들의 마음속에 민주화를 이룰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적인 봄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봄 당시 그들은 민주화의 열망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이 꿈들은 신군부에 의해 다시 뭉개지게 된다. 전두환의 장기집권 이후에 국민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확고한 민주주의를 수립했다고 보기 어렵다. 아직까지도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지금의 우리는 태어나서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는 민주화의 상황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국민들이 그렇게 염원하던 민주화의 열망이 만들어 낸 것이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서울의 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등장원인과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자.

목차

머리말
1.서울의 봄 2.등장배경과 원인
3.전개과정 ⑴정치적 전개과정 ⑵학생운동 전개과정
⑶노동자운동 전개과정
4.실패의 원인
맺음말

본문내용

2.등장배경과 원인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은 긴급조치로 일관된 정치의 암흑기였는데, 10∙26 사건을 계기로 암울한 유신체제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민주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넘쳤다. 이 시기에 절대 권력자가 사라짐에 따라 권력 내부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며 신민당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유신체제로 인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열망이 박정희 서거로 인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 이 당시 학생들은 ①10∙26 후의 개혁바람에 힘입어 ‘학원의 비민주적 적폐’를 시정할 호기가 성숙한데다 ② 과도체제를 장기화하려는 불투명한 정국 ③ 오랫동안 제약됐던 비판의식의 해방감 ④ 유신체제 아래서 정부시책에 지나치게 영합, 밀착했던 일부 학원재단에 대한 불신 ⑤ 10∙26 이래 오랜 겨울방학을 거쳐 새학기를 맞은 계절감각 등이 복합적인 요인이 되어 학원가의 시위는 충분한 내연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유신체제에서의 경제상황은 특권과 특혜로 얽힌 정부 주도형으로서 경제가 권력의 손아귀에 있었고, 따라서 권력과 유착된 특권재벌 또는 대기업만이 성장하고 중소기업과 소비대중은 피해만 입었으며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노동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원인들로 인해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서울의 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3.전개과정
⑴정치적 전개과정
서울의 봄을 맞아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3 金 씨가 각기 상이한 역할과 위치에서 10∙26을 맞아 대권경쟁에 나서게 된다. 먼저 야권의 두 金씨인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후보 경쟁에 치열한 소모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 입당이 여의치 않게 된 김대중은 대중적인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장외활동을 전개했고, 김영삼 역시 신민당의 시도지부 개편대회 명목으로 군중집회를 서둘렀다. 이 두 세력의 감정적인 대립은 유혈사태가 벌어질 만큼 격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5∙16의 주동자이고 박 대통령과는 인척간이면서도 ‘一人之下’와 ‘요시찰인물’이라는 기복을 겪어오다가 박정희의 퇴진사건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계기를 맞게된 김종필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이른바 정풍운동파에 의한 격렬한 도전으로 그의 존립기반은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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