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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명대 과거제도와 신사층의 발달

저작시기 2006.09 |등록일 2006.12.31 한글파일한글 (hwp) | 6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명대 과거제도와 신사층의 발달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명대의 과거제도
2. 명대의 신사지배체제

본문내용

1. 명대의 과거제도
명 태조는 중국을 통일한 지 3년 만인 1370년에 과거제를 부활시켰는데 이것은 문관우위의 시험을 통해 한 나라의 문병(文炳)을 바로 잡는다고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대에 중단되었던 과거제를 부활시킨다는 것은 단순한 시험제도의 부활이 아니다. 이는 시험의 내용인 유교의 정통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유교가 구현하고자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재확립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대는 한족의 국가주의가 반동을 일으킨 시대이며, 과거제도는 그 속에서 중국의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하나의 제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문치주의인 중국의 최대 특징은 과거제로 선발된 문관이 나라를 지배한다는 데 있었다.
명대의 과거제는 송대의 과거제와 교육체제를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과거제와 교육체제는 그 운영과 내용면에서 명대 특유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명대의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명대의 과거제에서 특기할 점은 먼저, 명초부터 과거응시 자격을 학교의 학생만으로 제한함으로써 과거제가 학교제를 포괄하게 된 점이다. 이전(宋代)의 과거제는 학교제와는 거의 별개로 독립되어 존재하였다. 다시 말하면 과거를 응시함에 있어서는 학교의 학생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지방관의 보증만 받으면 되었다. 그러나 명초부터는 반드시 학교의 학생이어야만 응시할 수 있도록 못을 박았다. 따라서 명대 이후의 과거제는 학교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와 함께 교육과 과거의 유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다.

1) 명대의 학교제
명조(明朝)는 처음 건립되었을 때 관원을 주로 천거를 통해 뽑았는데 조정과 지방 대소 관원은 모두 천거를 할 수 있었고, 천거된 자도 다른 사람을 추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통치 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명태조 홍무(洪武) 2년에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전국의 부(府)ㆍ주(州)ㆍ현(縣)마다 유학(儒學)을 세우게 하고 또 수도인 응천부(應天府)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세웠다. 이로서 지방에는 부ㆍ주ㆍ현학이 중앙에는 국자감이 생겨났다. 유학의 입학지원자를 동생(童生)이라 하고 입학시험을 동시(童試)라고 하여 동시에 합격하여 유학에 입학이 허락된 학생을 생원(生員)이라고 하였다.
명대의 과거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 하나가 바로 국자감인데, 이 국자감의 학생은 감생(監生)이라 하였고 부ㆍ주ㆍ현학에서 규정에 따라 보내졌다. 고관과 공신자제 역시 음(蔭) 혹은 공(功)으로 감생이 될 수 있었다. 전대에는 관인의 자제만이 입학되었으나, 명초부터는 서민에게까지 개방되었고 또 유학과 직접 연결되고 동시에 과거제도와도 직접 연결되었다.

참고 자료

히라카와 스케히로, 2002, 마테오리치, 동아시아
신채식, 2006, 동양사개론,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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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1998, 명청시대 신사(紳士)의 역할<정기심포지엄 발제문>
티모시 브룩, 2005, 쾌락의 혼돈,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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