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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점수A

제갈량의 출사표 강독 및 인물 배경에 대해

저작시기 2006.12 |등록일 2006.12.29 한글파일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2,800원

소개글

제갈량의 작품 `출사표`를 중심으로 제갈량의 생애/작품배경/강독에 대해서 정리한 자료입니다.
먼저 제갈량의 생애를 정사삼국지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다음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을 서술하고, 끝으로 강독은 최대한 정확하고 꼼꼼하게 작업하였고, 사실을 바탕으로 문헌들을 참고하고 각주를 달아 동류의 타 문헌과 차별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차

1. 제갈량 (諸葛亮, 181~234)

2. 출사표 (出師表)
※ 《출사표》의 시대상황적 배경

3. 강독

(1) 현 정세판단과 국내 상황에 대해
(2) 법의 경중에 대한 적용을 균등하게 할 것에 대해 당부
(3) 궁중과 군영의 일을 의논할 만한 인재에 대해
(4) 현군의 자세에 대해
(5) 선제에게 받은 은혜에 대해
(6) 중원 평정과 출병이유에 대해
(7) 당부와 결언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제갈량 (諸葛亮, 181~234)

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서주(徐州) 낭야군 양도현(琅琊郡 陽都縣)에서 출생하였다. 원래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荊州)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仕官)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다.
한(漢)나라 헌제(獻帝) 건안 12년(서기 207년) 유비(劉備:玄德)는 위(魏)의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荊州)로 도망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유비는 재기(再起)하기 위하여 인재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유비의 아래 있던 서서(徐庶)가 제갈량을 추천한다.

서서가 말하기를, "저의 친구 중에 제갈공명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물에 잠긴 와룡(臥龍)과 같은 인물로 한번 만나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사람은 가서 볼 수는 있어도 억지로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몸을 굽혀 수레로 찾아가야만 됩니다” 유비는 제갈공명을 꼭 만나보고 싶다고 하며 그를 데리고 올 방법을 묻자 서서는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때문에 유비는 가서 제갈량을 방문했는데, 모두 세 차례 찾아간 이후에야 비로소 만났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은 유비(劉備:玄德)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赤壁)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益州)를 유비의 영유(領有)로 하였다. 그 후도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웠고, 221년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서기 233년, 유비는 영안(永安)에서 병세가 위중했으므로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와 후사(後事)를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당신의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대사업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만일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라면 그를 보좌하고, 만일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할 수 있습니다." 제갈량은 이 말에 몹시 감동하여 유비에게 말했다. "신은 감히 전력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가지 있겠습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蜀)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魏)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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