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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전 고찰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12.25 한글파일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1,200원

소개글

임경업전에 대해 발표했던 자료입니다.

목차

1. 시대 배경
2. ‘임경업’전의 줄거리
3. 작품 분석
3-1. 주제
3-2 ‘임경업전’에서 드러난 사실과 허구
3-3 사실과 허구에 대한 정리
4. 임경업전 출간의도
5. 박씨전과 임경업전의 상관관계
6. 임경업전의 수용과 소설사적 의의

본문내용

애초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기반을 마련한 조선왕조는 16세기 말에 이르면 사화와 당쟁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이와 같은 국력의 낭비는 왜의 침략을 인한 임진왜란(1592)을 초래하였다. 비록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을 축출하기는 하였으나, 7년에 걸친 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토는 피폐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과 조선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고, 이 틈을 타서 북방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세우고(1616) 조선과 명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을 거쳐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양면 외교정책으로, 후금에 대해서도 우호적 입장이었다. 광해군은 후금의 세력이 크게 성장할 것을 내다보고, 실리 없는 전쟁은 가능한 한 회피하면서 국토를 보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일부 명분론자들에게 갖가지 방해를 받아 정책을 수행하는데 곤란을 겪기도 했으나, 북방 정세를 예지한 광해군의 후금 정책은 일단 성공하여 직접적인 무력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초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친명배금정책을 뚜렷이 했다. 이러한 정책변화는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켜서 후금의 제1차 침입을 받게 만드는데 이것이 이른바 정묘호란(인조5년, 1627)이다. 그리고 그 결과 조선 조정은 후금과 형제지맹의 강화를 맺고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후금의 태종은 자신을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조선에 칭신례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군신관계의 요구에 크게 반발한 인조는 청사를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인조14년 12월에 제 2차 침입을 받아 민족사에 쓰라린 상흔을 남긴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게 된다. 조선은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할 것, 왕자와 대신의 아들들을 볼모로 보낼 것, 명과의 교류를 끊을 것 등의 치욕적인 조건으로 청과 강화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비교했을 때, 재정궁핍같은 물질적인 피해보다는 정신적인 상처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비록 45일간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이전까지 오랑캐라 무시해오던 후금의 왕에게 조선의 국왕이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추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세자와 대구마저 끌려가는 치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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