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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 5호 성명

저작시기 2006.12 |등록일 2006.12.24 한글파일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반도 점령정책인 미소공도위원회 5호 성명에 관한 설명입니다.
많은 활용 바랍니다.

목차

1. 신탁통치 혹인 점령
2. 38선 확정
3. 미군의 진주
4. 소련의 진주
5. 모스크바 3상 협정
6. 마침

본문내용

1. 신탁통치 혹은 점령

신탁통치의 근원은 191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대통령이던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외치며 동시에 위임통치라는 해괴한 말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일차대전 전승국들이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분리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물론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여전히 일제하에 놓여있었고 민족 자결주의는 우리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윌슨을 멋지다고 생각한 루즈벨트는 자기도 본받아서 이차대전 직후 신탁통치라는 이름으로 위임통치 비슷하게 하려했다. 40년에 이미 범미국신탁통치안이라는 정책이 마련되었고 이것은 시행되기도 전인 41년에 중국의 망명 한인들에게 알려져 반발을 샀다. 한국인들은 즉시 독립이 아니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아시아에서 해방된 국가는 자치능력이 부족하므로 교육을 통한 준비기가 필요하다면서 이를 42년 8월에 확실한 정책으로 삼는다. 이것이 해외로 알려지자 김구, 이승만 등은 즉각 반발했지만 망명 정객의 반발쯤이야 간단히 무시되었다.

43년 11월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미영중의 수뇌들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했고 이는 우리에게 와전되어 많은이들은 곧 독립되리라고 예상하였다. 같은 시기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루르벨트는 한국민은 사십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스탈린에게 말했고 스탈린은 적당히 동의했다. 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도 구두합의만이 재확인되었다. 여기서 스탈린은 영국도 회담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얘기했는데 당시 극동에 딱히 이권이 없던 영국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소련이 우리나라에 큰 관심이 없고 단지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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