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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학]일제치하 조선, 동아일보는 친일지 였나 반일지였나?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12.22 한글파일한글 (hwp) | 11페이지 | 가격 1,800원

소개글

일제치하 조선, 동아일보는 친일지 였나 반일지였나? 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내용, 형식 깔끔하게 정리 되어있구요.
신문방송학 공부하시는 분들 도움되시겠네요.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일제치하 민간언론의 형성과 시대적 배경


2. 조선일보 창간과 언론활동

1)조선일보 창간과 역사
2)조선일보의 반일 언론활동
3)조선일보의 친일 언론활동


3. 동아일보 창간과 언론활동

1)동아일보 창간과 역사
2)동아일보의 반일 언론활동
3)동아일보의 친일 언론활동



Ⅲ. 결 론

본문내용

2)조선일보의 반일 언론활동
총독부 당국은 조선일보의 창간 주체가 중견 실업인들인 만큼 친일적인 실업 신문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 신문의 간부들은 대체로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에 참여한 실무진들은 투철한 반일 사상의 젊은 엘리트들이어서 조선일보는 창간 초부터 수난을 겪게 되었다.
급하게 신문을 창간한 후 곧 휴간에 들어갔다가 복간하자마자 조선일보는 총독부로부터 첫 압수 조치를 당했다. 1920년 4월 28일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 왕족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의 결혼을 보도하면서 이 신문은 이은과 혼약하였다가 파혼당한 민 규수를 탐방하여 근황과 심경을 물어 보도했다. 총독부는 이 기사가 일본의 강압 결혼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압수 조치를 내렸다.
1920년 8월 27일자에는 “자연의 화(化)” 라는 제목으로 미국 국회의원단 일행의 내한을 환영하는 논설을 실었다가 민영 신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간 조치를 당했다. 이 신문은 9월 3일 정간이 풀리자 9월 5일자에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를 정간시켰나뇨”라는 논설을 실어 다시 무기 정간 조치를 당했다.
조선일보는 1925년 9월 8일자에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 라는 논설을 실었다가 3차 정간을 당했다. 사설의 요지는 소련 영사관이 개설된 데 주목하여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집필자 신일용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총독부 당국이 사법경찰권을 발동하여 구속까지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2)동아일보의 반일 언론활동
동아일보는 창간 2주일 만인 4월 15일자 사회면에 “평양에서 만세 소요”라는 제목으로 3·1운동 첫 돌을 맞아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 민중의 움직임을 보도하였다가 처음으로 발매 반포 금지의 행정 처분을 받았다. 이것을 기점으로 동아일보는 잇달아 발매 반포 금지, 삭제, 압수 등의 필화 사건을 일으켰다.
창간한 지 6개월을 채 안 된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는 1차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정간의 직접 원인은 장덕수가 집필한 사설 “제사 문제를 재론하노라” 에서 일본 황실의 상징인 거울 구슬 칼의 이른바 3종의 신기(神器)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경북 영주의 한 주부가 냇물에 투신자살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주부는 “시모상을 당하여 조석으로 상식을 하였으나 기독교 신자인 그 남편이 우상 숭배라 하여 상식을 금하자 죽음으로 불효를 갚겠다.” 하여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해 이 신문은 일차로 제사는 우상 숭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설을 실었다. 장덕수가 쓴 이 논설에 대해 기독교계에서 반

참고 자료

1.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최민지, 김민수 공저 일월서각, 1978
2. 일제하 한국 언론 투쟁사 정진석, 정음사, 1975.
3. 민족문제연구소(www.banmin.or.kr)
4. 조선일보역사 단숨에 읽기, 조선일보사, 2004
5. http://www.naver.com 내이버 지식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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