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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12.21 한글파일한글 (hwp) | 11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대대적인 민족운동 갑신정변과 임오군란에 대해
그 배경과 결말,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목차

Ⅰ. 갑신정변
1. 갑신정변의 배경
(1) 구미열강과의 외교
(2) 차관교섭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2.갑신정변의 결과
⑴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⑵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⑶ 조선ㆍ일본의 교섭과 〈한성조약〉의 체결
⑷ 청국ㆍ일본의 교섭과 〈천진조약〉의 체결
3.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Ⅱ.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배경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3) 하층민의 저항운동
2.임오군란의 영향.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2) 청의 대조선 정책 변화와 영향력 확대.

본문내용

1. 갑신정변의 배경
(1) 구미열강과의 외교
개화당 인사들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보다 외국사정에 밝았으며 국제사정에 민감하였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에서 번역된 국제법 서적인 《萬國公法(만국공법)》을 통해 19세기 후반기 국제관계에서 널리 통행되고 있던 세력균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균세법이야말로 약소국 조선이 당시 위협을 가해오고 있는 열강들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개화당 요인 중에는 외교 부문에 근무한 인사들이 여러 명 있었으므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외교활동을 펼치는 데 유리한 입장이었다.
개화지식인들은 임오군란 뒤 조선의 정치에 대한 청국의 간섭이 노골화되면서 조선의 독립에 위협을 가해오자 구미세력을 끌어들여야 된다고 믿고 있었다. 먼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은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인 고종 19년(1882) 5월 22일에 열강을 끌어들여 러일 양국을 견제한다는 以夷制夷(이이제이) 정책을 추구하였던 李鴻章(이홍장)의 주선으로 체결되었다. 이홍장은 자신의 주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성립된 지 2주 뒤인 6월 6일에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관세율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비준이 거부되자 종래의 관세율에서 거의 절반이나 인하된 내용으로 11월 26일 조영․조독수호통상조약을 다시 조인하였다. 또한 개화당 인사들은 조선과 수교를 원하는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러시아(1884) 및 프랑스(1886)와도 각각 수교를 맺게 되었다. 당시 개화당 요인들은 청국공사관과의 접촉은 끊고 있었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는 개화당에 대해 냉랭한 태도였으므로 미국 및 영국공사관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미국의 힘을 빌려 청국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빈번히 미국공사관에 출입하였고 푸트공사와 포크무관과 접촉하여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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