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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당 조사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12.18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개운조사는 1790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속성(俗性)은 金氏이고 어머니는 楊氏였다. 개운조사는 외동 아들이었다. 개운조사의 아버지는 개운조사가 세살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자 외삼촌 부부가 개운조사를 데려다 아들처럼 길렀다. 외삼촌 부부는 아이가 없었다. 한데 외삼촌도 개운조사가 일곱살때 죽었다. 이에 개운조사가 상주(喪主)가 되어 3년상을 치렀다. 외숙모도 2년 뒤에 죽었다. 개운조사는 혼자서 외숙모의 3년상을 치렀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孝心에 큰 감동을 받아 개운조사를 양효동(楊孝童)이라 불렀다. 아홉살에 외숙모마저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개운조사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뼈져리게 느꼈다. 또 피붙이들을 모두 앗아간 `죽음`이 너무도 두렵고 싫었다. 죽음을 이기는 길을 알고 싶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레닌이 짜리 정부의 체포령을 피해 눈보라를 무릅쓰고 핀란드만의 얼음 위를 건너 핀란드로 가다가 죽었더라면 러시아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여.”

‘역사란 우연이냐 필연이냐’
를 놓고 80년대 종로 어느 뒷골목 후미진 옴팡집에서 논쟁을 벌일 때 흔히 등장했던 이야기이다. 지리산 반야봉에서 개운당 조사를 만나게 된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반야봉 정상에 오른 뒤 16명의 대사들이 삼도봉과 뱀사골 계곡을 따라 하산하였지만 푸소와 현주를 뒤따라 나선 것은 결코 필연은 아니었다. 또한 인월에서 백신종 선배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개운당 조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은 백선배로부터 개운당 조사 얘기를 듣고 챨@?되짚어 다시 반야봉으로 가서 개운당 조사와 함께 실상사까지 내려온 과정을 덧붙여 가며 쓴 것이다.

반야봉에서 안개비를 뚫고 20여분 내려가자 헬기장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을 만났는데 그들로부터 뱀사골 대피소로 가려면 내려가다 오른쪽 방향으로 가야 하며 길이 매우 험하다는 말을 들었다. “거대한 흙덩어리 지리산이 험하면 얼마나 험하겠어.” 세 사람이 속으로 동시에 내뱉는 말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왔다.

능선을 따라 미끌어지듯 내려오는데 왼편으로는 달궁, 오른편으로는 묘향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잠시 멈추어 지도를 보고 뱀사골대피소와 현위치를 가늠해본 다음 능선에서 벗어나 오른쪽 묘향암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내려가니 ‘묘향대’라 쓴 안내판 하나가 달랑 서있다. 저 아래 달궁계곡과 맞은 편의 만복대는 짙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10여분 내려오자 커다란 집 한 채가 안개 속에서 우뚝 다가왔다.
“이곳이 바로 묘향암이구나”
급한 경사면을 깎아 축대를 쌓고 집을 지어올렸는데 녹슨 양철지붕이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을 걷어낸 70년대의 농가를 연상케 했다. 해발 고도가 1450미터이니 반야봉 팔부능선에 자라잡은 셈이다. 태백산 망경사 1363미터보다 더 높다. 댓돌 위에 신발 세 켤레가 보이고 열심히 불경을 읽는 스님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마당에는 텐트가 한 채 지어져 있고 마당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오솔길이 이어지는데 그 끝에 편평한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괴나무를 잘라 만든 좌대가 놓여있다. 신선이 된 개운당 조사가 하계를 굽어보는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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