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평가점수C

김산의 삶과 아리랑에 관한 연구

저작시기 2006.12 |등록일 2006.12.18 한글파일한글 (hwp) | 22페이지 | 가격 3,800원

소개글

민족적 공산주의 운동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과 그와 님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연구한 논문식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출생과 성장
1. 외모
2. 출생과 가족관계
3. 가출과 일본유학
4. 중국으로...
5. 상해에서 공산주의자가 되다
Ⅲ. 격동의 서른세해
1. 광주에서 혁명에 참가하다
2. 한위건과의 대립
3. 두 번째로 체포당하다
4. 짧은 결혼생활
5. 다시 혁명 속으로...
Ⅳ. 님 웨일즈와 아리랑
1. 김산과 님 웨일즈의 만남
2. 아리랑이 출판되다
Ⅴ. 김산의 죽음
1. 김산의 죽음
2. 저술활동
Ⅵ. 김산의 가족과 복권
1. 김산의 가족
2. 김산의 복권
Ⅶ. 평가
Ⅷ. 결론
연표
✐참고 문헌 및 관련 사이트

본문내용

Ⅰ. 서론

2005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정부에서는 잊혀졌던 독립유공자들에게 대거 명예 회복과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서했다. 그중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김산(장지락)에게도 국내에서는 뒤늦은 감이 있으나 독립유공자 서훈이 추서되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는 이미 1941년에 헬렌 포스터 스노우(님 웨일즈)의 `Song of Alriran`이 출판되면서 김산 이라는 인물이 세상에 알려지고 응당한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1953년 10월에 아리랑이 번역 출판되었고 계속해서 제2판이 출판되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김산의 생애 활동 무대였던 중국에서도 1983년에 이미 김산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중국 공산당에 큰 공을 세운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 북한에서는 일찍이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김산을 언급하며 그를 독립유공자로서 인정하고 있으나 유독 한국에서 그에 대한 평가와 명예에 대한 회복이 늦어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2006년 2학기의 공산주의 운동사 수업은 그동안 이념의 갈등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많은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연구해 봄으로써 인물위주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공부해보는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다. 특히 김산은 민족주의자로서, 공산주의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도 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 많은 귀감을 줄 수 있는 스승과 같은 존재로서 꼭 탐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정부는 뒤늦게 김산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을 독립운동가로서 인정했지만 이전에도 암암리에 아리랑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며 읽히고 김산에 대한 연구가 있어왔던 것으로 안다. 이제는 비로소 공개적으로 김산이 인정받게 된 이상 아리랑과 김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공부해 보는 것이 뜻 깊지 않나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을 통해 먼저 김산의 출생과 성장 배경에 대해 서술하고, 그의 33년 생애와 업적을 살펴본 뒤 김산이란 인물을 세상에 소개한 아리랑과 님 웨일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김산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와 추측에 대해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김산의 가족과 그의 복권 배경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마친 후에 본고를 결론 맺고자 한다.

Ⅱ. 출생과 성장

1. 외모
아리랑을 통해 님 웨일즈는 김산의 외모를 ‘그의 얼굴은 윤곽이 뚜렷한 것이 묘하게도 중국인 같지는 않았고, 반(半)스페인 풍의 사람처럼 아주 멋이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 사람이 유럽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산의 키는 175가량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남자답고 호남형으로 생긴 것으로 보인다.




◀ 27세의 김산. 이 사진은 1930년 11월 북경에서  체포된 김산이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신문을 받은 뒤 신의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촬영한 것.
출처: 벤처아리랑 (http://www.arirangnara.com)









◀ 1937 중국 연안에서의 김산.
김산이 처형되기 수개월 전에 님 웨일즈가 직접 찍은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2005-03-29



2. 출생과 가족관계
김산은 1905년 평북 용천 차산리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이고 김산(金山)은 훗날 님 웨일즈가 지어준 가명이다.
김산의 부모는 자작농으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가난하였다. 형제관계는 큰 형과 작은 형이 있고 그는 셋째였는데 그를 종종 도와주곤 하던 것은 둘째형이었다. 보수적이던 아버지와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가출과 일본유학
11살 되던 해에 김산은 집을 나왔다. 그 이유는 김산이 다니던 학교에서 같은 반의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녀석과 다투어 그 코를 짓뭉개 놨는데 이것을 안 아버지는 노발대발 하셨고 김산이 거기에 대들었기 때문이다. 가출한 김산은 당시 김산을 특히 아끼고 잘 도와주던 인정 많은 둘째형의 도움으로 계속 공부를 하여 기독교계 학교에 입학했다. 김산은 사실 처음엔 기독교를 믿었으나 당시 기독교계 학교의 외국인 교사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죄가 많아서 이고 그들이 회개해야만 한다고 일본의 식민 지배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이 시기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김산은 무정부주의에 심취했었고 삼일운동이 가라앉고 나서 얼마 후에 역시 둘째형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유학생활을 했다.

4. 중국으로...
일본에서 1년여 고학생활을 하던 김산은 모스크바로 떠날 것을 결심했다. 그 이유는 당시 혁명과 사회주의 사상의 물결이 일고 있던 모스크바야 말로 지식의 제1의 메카이고 일본보다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산은 집으로 돌아가 작은형이 맡겨둔 생활비를 몽땅 훔쳐서 중국 안동(安東)으로 건너가 당시 신사상의 주 원천이던 모스크바로 향했다. 안동에서 하얼빈행 기차를 탔으나 당시 짜르왕조와 혁명세력이 다투고 있던데 일본군이 간섭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관계로 하얼빈에 갈 수 없었다. 결국 김산은 중도에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어 만주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갔다. 이회영(李會榮) 등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입학연령을 18살로 삼고 있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김산이 신흥무관학교에 당도하여 입교를 희망하자 학교에서는 김산의 나이가 제한에 걸려 입교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며 마적이 우글거리는 험한 길을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며 옥편 하나 들고 걸어온 이야기며, 밤마다 돈을 땅속에 파묻었다가 새벽이면 다시 파내어 아침도 먹지 않고 길을 떠나 칠백릿길을 한달여 동안 혼자 걸어 신흥무관학교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했다. 학교 측에서는 이를 측은히 여겨 김산을 예외로 입학시켰다. 신흥 무관학교에서 김산은 우수한 성적으로 수학하고 좀 더 넓은 곳에 가서 배우며 혁명 활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5. 상해에서 공산주의자가 되다
상해에서 16세의 김산은 낮에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한국어 교정계 겸 식자공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한국인성학교에서 영어공부와 에스페란토어, 무정부주의 이론 등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김산은 소년시절의 우상이던 이동휘를 비롯해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에 하나로 꼽은 안창호, 이광수 등을 만났다. 그리고 김산은 의열단에도 가담하게 되는데 의열단에서는 걸출한 테러리스트 오성륜(吳成崙)과 김약산(金若山=金元鳳)을 만나서 친분을 쌓게 됐다.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던 김산은 상해에서 의열단을 만나 무정부주의에 빠져들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던 김산은 의열단의 정식 단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만의 서클에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김산 자신과 의열단의 테러리스트들 대부분은 톨스토이즘에 심취한 인도주의자들 이었으나 테러리스트와 인도주의자라는 모순적인 관계를 김산은 “시대는 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가장 열렬한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정리했다.
김산이 막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921년 그가 북경으로 옮긴 뒤의 일이었다. 그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을 만나 막스주의를 사사받았다. 다른 사람의 감화와 신사상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열일곱 사춘기의 나이에 김충창을 만난 김산에게 자신보다 열 살 위의 김충창은 단지 선배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벗이요 동지가 되었다.

참고 자료

<단행본>
․ 김산, 님 웨일즈, 조우화 역,『아리랑』 경기 파주: 동녘, 2000
․ 이회성, 미즈노 나오끼, 윤해동 외 역,『아리랑 그후』 경기 파주: 동녘, 1993
<신문>
․『경향 신문』 2005년 8월 17일자
․『오마이뉴스』 2005년 3월 29일자
․『한겨레 신문』 1999년 1월 4일자
<사설>
․ 한홍구, “잊혀진 혁명가 김산의 눈물과 투쟁과 죽음, 그 발자취를 찾아서”, 『아리랑 나라』 http://www.arirangnara.com (검색일자 2006년 11월 5일)
․ 한홍구, “트로츠키파·일제특무·반혁명분자로 몰려 죽은 김산의 발자취를 찾아서”, 『아리랑 나라』 http://www.arirangnara.com (검색일자 2006년 11월 5일)
<관련 사이트>
․『아리랑 나라』http://www.arirangnara.com (검색일자 2006년 11월 5일)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검색일자 2006년 11월 5일)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