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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성립과 변천

저작시기 2005.10 |등록일 2006.12.17 한글파일한글 (hwp) | 25페이지 | 가격 1,600원

소개글

고구려의 건국부터 시작하여 멸망까지, 그리고 정치체제 등 모든 것을 정리한 레포트

목차

Ⅰ.고구려족의 기원
★예와 맥이란
1)고구려족의 변천
2)고주몽의 건국전설
3)북부여 출자설과 부여 출자설
4)동부여 출자설
※주몽건국신화에 나타나 있는 의미

Ⅱ.고구려 초기의 정치체계
1)`부` 성격과 그 구조 파악의 필요성
2)`부`의 성립
①부의 기원
②부의 용례
③부의 왕권
④5부의 성립시기
3)부체제의 구조
①부내(部內)부, 집단(集團)예민, 후국(侯國)
②읍락민과 가(加)
4)부체제하의 정치제도
①관등제와 제가회의
②동맹(東盟)제
5)고유명 부에서 방위명 부로

Ⅲ. 중앙집권화 정책
① 중앙정치제도
② 지방행정제도

Ⅳ.고구려의 대외관계
(1) 고구려와 중국 왕조
(2) 고구려와 백제신라에서 알아보는 대외관계

Ⅴ. 고구려의 한강유역 상실의 원인
1). 신라, 백제의 국력신장 결과
2). 고구려의 대내외적인 변화
1) 대내적 : 정치적인 분쟁(왕위계승분쟁과 귀족간의 내분)
2) 대외적 : 돌궐, 북제의 북부, 서부 경계선 위협

Ⅳ. 결 론

본문내용

Ⅰ. 고구려족의 기원
고구려족은 중국 동북지구 고대 예맥족의 한 갈래이다.
중국 동북 경내의 예맥족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서주시대(西周時代)부터 예맥인은 중원지구와 관계, 주왕조에 짐승가죽을 바쳤다.
★ 예와 맥 이란
서로 다른 지역의 예맥인을 대표하는 것이다.
예인은 지금의 송화강(松火江)과 눈강(嫩江) 초원지구에 거주하던 어렵부락(漁獵部落)이고, 맥인은 지금의 혼강과 압록강 산간 계곡지역에 거주하던 유럽부락(遊獵部落)이었다.
⇒ 서로 인접해 있고 모습은 서로 비슷하고 언어는 같으며 습속이 가까웠기 때문에 춘추시대부터 사서(史書) 중에 자주 예맥이란 연칭으로 나타났다. 즉, 같은 족류의 남북으로 갈라진 두 가지였다.
고대 동북의 여러 종족 중 예맥족은 가장 일찍 중원의 정력문화(鼎?文化)를 받아들이고 전파한 원시민족이었다. 북부 예맥족은 최초 동북 고대 민족정권인 부여국(夫餘國)을 건립했다. 역대로 발음과 주역이 달랐기 때문에 옛 서적 중에는 부여를 탁리(?離), 고리(藁離), 색리(索離), 고이(高夷), 구려(句麗)등으로 나누어 칭했으며, 왕왕 고구려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 적기도 하였으니 이는 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족원(族源)임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1). 고구려족의 변천
지금의 혼강 산곡지역에 거주하던 부락을 소수맥이라 칭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대수는 압록강이었으며, 그 지역에 거주하던 맥인은 대수맥이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한반도에 출병, 위씨조선 정권을 정목하고 4군(낙랑, 현도, 진번, 임둔)을 설치. 관리를 두고 진번군은 맥인부락 통제 고구려현을 두어 진번군에 예속시켰다. 그 곳에 거주하던 맥인부락은 그 당시 이미 고구려인이라 불려졌다.
한 원제 연간 (기원전 48~33년)에 북부여 왕실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서자 출신의 왕자 추모1)는 재능이 뛰어나 왕자들 및 여러 신하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 여러 차례의 박해를 당해, 남쪽 혼강 유역의 졸본천(卒本川)으로 도망했다. 졸본은 홀본(忽本)으로 쓰기도 하는데 모두 예맥이라는 단어의 음의 전환이다. 추모 일행은 그 지역의 맥인을 모아 기원전 37년 예맥인의 졸본부여 정권을 공동으로 건립하니, 이것이 바로 고구려였다.

참고 자료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 교보문고, 1984
서병국, 『고구려 제국사』, 혜안, 1997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김부식 저․김종권 역, 『삼국사기』, 명문당, 1988
노중국 외, 『韓國 古代國家의 形成』, 민음사, 1990
이지린 외, 『고구려 역사』, 논장, 1988
이전복 외 공저, 인 구 외 공역, 『고구려간사』,삼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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