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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교육영향

저작시기 2006.12 |등록일 2006.12.16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1,400원

소개글

도산 안창호의 교육영향에 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안창호의 생애
2. 도산의 교육사상
3. 도산의 교육활동
4. 도산의 교육사상이 현대 교육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1. 안창호의 생애

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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