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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저작시기 2005.10 |등록일 2006.12.16 한글파일한글 (hwp) | 11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목차

1. 문제제기
2. 중공군 개입배경
3. 중공군 개입후 경과
4. 맺음말

본문내용

1. 문제제기

우리는 얼마 전 6월 25일로 벌써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5주년을 맞게 되었다. 달리 말해 대한민국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 뒤로 55년째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가 된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6·25’라는 전쟁 발발일로 1950년의 전쟁을 즐겨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 국민에게는 6월 25일의 북한의 전쟁 도발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내전적 인식이 강하지만, 우리가 한 학기 동안 배워왔다시피 한국전쟁은 세계 3차 대전의 대체전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남·북한을 접점으로 하여 미국과 소련·중국의 세력 다툼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쟁이기도 하였다. 한반도를 분단으로 이끈 한국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한국을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앞으로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특히 UN군 개입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격퇴하고 한반도를 통일하려던 찰나 개입하여 결국 한반도를 분단으로 이끈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전쟁의 이해에 있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중공군의 개입 배경에서부터 개입 후 1·4 후퇴에 이르기까지의 경과와, 중공의 득과 실까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중공군의 개입배경
인천상륙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맥아더의 대담한 작전은 다행히도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군은 궤멸 당했고 북한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곧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로 제기되었고, 9월 25일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동안 맥아더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명령서는 군사행동의 목표를 “북한 군대의 궤멸”로 규정했다. 이때까지는 소련과 공산 중국이 한국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확실히 피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27일이 되면서 점차 중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길 원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후르시초프 회고록’과 ‘한국전쟁 관련 소련 극비외교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국은 한국전쟁의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 중·소 협의도 비교적 간단하게 이루어 졌으나 중국은 한국전쟁의 준비과정과 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공산당정권은 국민당정부와의 장기간의 투쟁에서 일어난 경제문제, 즉 막대한 국비부담과 인플레이션 및 생산력 저하 때문에, 그리고 티베트와 대만의 ‘해방’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비적 소탕전에 몰두해 있어서, 한국전쟁의 준비과정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일본을 무장력에 의존하여 지키되, 주변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 대만과

참고 자료

1.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출판, 2002.
2. 이완범. {한국전쟁-국제전적 조망}. 백산서당, 2000.
3. 김학준. {한국전쟁}. 박영사, 1989.
4. 윌리엄 스툭, {한국전쟁의 국제사}. 김형인 외, 푸른역사, 2001.
5. 허출. [중공의 한국전쟁 개입에 관한 연구]. 국방대학교:석사논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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