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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12.12 한글파일한글 (hwp) | 2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목차

1. 성기호설(性嗜好設)
2. 심신묘합(心身妙合)의 인격형성과 지천(知天)의 수행

본문내용

♤ 다산 정약용 ♤
* 정약용, 그는 유배지에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헐벗고 굶주린 이 땅의 백성들과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군 `마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문장이 뛰어났다. 그리고 22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전사가 되었고, 곧 생원이 되어 태학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하였다.
정약용은 한강 주교를 설계한 후 정조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연천지방을 암행하게 되고, 헐벗고 굶주린 채 수탈 당하고 있던 농민들의 참상을 보게 되었다. 암행어사를 마치고 돌아온 정약용은 화성축조공사를 시행하면서 거중기와 녹로를 발명하였다. 이어, 그는 1795년에 정 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4월인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이 발생하자 공서파의 모함을 받게 되고, 7월에는 정 6품의 외직 문관 벼슬로 좌천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천주교 관계자로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연말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1801년, 천주교 탄압을 위한 사학금령. 즉 300여명이 죽은 신유사옥이 일어나게 되었다. 정약용은 한 천주교도가 정약용의 윗형인 약종에게 보낸 편지에 `자네의 아우가 알지 못하게` 라는 문고로 인해 죽음을 모면하게 된다. 하지만 공서파에서 정약용을 억지로라도 죽이려 하자,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18년, 이태순의 간곡한 진정으로 유배가 풀리게 된 다산 정약용은 고행인 아재로 돌아갔다. 그가 강진에서 보낸 16여년 동안의 유배 생활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권에 이르는 그의 저서와 사상을 민족의 유산으로 가지게 되었다.
[목민심서]에는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부임하는 관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은 정약용의 인생관과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경세유표]는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책이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쓴 편지에는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정약용이 편찬한 책들에 드러난 그의 인생관과 사상은 그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약용, 그는 오늘날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학자이자, 스승으로 남아있을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위대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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