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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과 풍수지리설

저작시기 2004.02 |등록일 2006.12.12 한글파일한글 (hwp) | 14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풍수지리설의 유포는 주로 선승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점에서 선종과 풍수지리설의 관계가 중시될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풍수지리설은 당시 사회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사회적 전환과정에 있어서 전진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려한다. 전진적 성격의 이해를 위해서 선종 수입 이전에 유포되었던 풍수지리설에 대해서 앞에 언급하였듯이 풍수지리설에 대해 검토하였다. 아울러 도선의 풍수사상이 왕건 태조의 고려개창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목차

Ⅰ.서론

Ⅱ.본론
1. 풍수지리설에 나타난 도선의 출신
2. 도선의 생애와 관련된 풍수지리설과 동리산파의 계보
3. 도선과 고려 태조 왕건과의 관계

Ⅲ. 결론

본문내용

Ⅰ.서론

사회적 전환기인 라말려초에는 그 시대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불교계에 있어서 선종의 대두였으니, 이 선종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교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하여 반성하고 반항하는 성격을 가졌었다. 선종은 새로 성장하고 있던 육두품 이하의 하급귀족이나 지방의 호족에 두고 있었던 점에서 자연 선교의 싸움은 진골족과 육두품 이하 하급귀족의 싸움, 중앙과 지방의 대결이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학에 대한 이해의 증가로 폐쇄적인 상층 독점지배층인 진골귀족세력에 도전하면서 성장하고 있던 육두품의 대두와 함께 그에 따라 초기에 부수되어 이해되던 단계를 지나 유학을 전문적으로 받아들이는 지식계급이 새로이 성립된 것이었다.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이들 지식계급들은 새로운 정치이념을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편제방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로장사상의 류행이었다. 신라하대로 들어오면서 경주 중앙 진골귀족들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함에 따라 그러한 풍조에 반발하는 은둔적인 사상경향과 그에 따른 도교와 로장사상이 광범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는 경주의 중앙 진골 귀족이었으나 정권 싸움에서 밀려나 지방에 은거한 락향귀족의 자손들이었거나 진골세력에 반발하다가 탄압 받고 밀려난 육두품 이하의 하급귀족들의 자손들은 대개 이러한 도교나 노장사상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운동은 따로 분리되어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선승들은 대개 불교에 있어서 화엄종의 한계를 극복하는 사상체계로써 선종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노장사상 등을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 풍토였으며, 유학자라고 자칭하는 일반 문인학자들도 유교 이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등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유·불·도 3교가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추진되었고 나아가 복합화 되는 사상경향은 바로 이 시대 사상운동의 한 특징이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간계층인 육두품 계렬과 지방호족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경주 국도 중심 진골귀족 중심의 신라 고대문화를 극복하려는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1. 사료
삼국사기
고려사
편년통사
조선금석총람
도선비문

2. 단행본
최창조,『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이기백,『신라사상사연구-신라시대 불교와 국가-』, 일조각, 1986.

3. 논문
최병헌,「도선의 생애와 나말려초의 풍수지리설-선종과 풍수지리설의 관계를 중 심으로-」,『한국사상논문집선』20, 1998.
= 한국사연구11, 1975.
김두진,「나말려초의 동이산문의 성립과 그 사상-풍수지리사상에 대한 재검토-」, 『동방학지』.
서윤길,「도선과 그의 비보사상」, 『한국불교학』1, 한국불교학회, 1975.
강중탁,「도선의 연구」,『월산 임동권박사 송수 기념논문집』, 1986.
이기백,「신라 오악의 성립과 그 의의」,『진단학보』제33호 소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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