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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김옥균의 사상과 생애

저작시기 2006.10 |등록일 2006.12.08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2,500원

소개글

김옥균의 사상이 어디에서 내려 왔는지
또 그의 사상은 어디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있습니다
관련사진들도 포함시켰습니다.
김옥균의 생애와 김옥균의 암살사건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내용

김옥균↓
조선 말기의 정치가ㆍ개화운동가. 분관은 안동,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공주출신.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재종숙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961년 양부 병기가 강릉부사로 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當)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ㆍ시ㆍ글씨ㆍ그림ㆍ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은 자본주의 열강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봉건체제 내부에는 정치적·경제적·사상적 위기가 파국적으로 깊어져 가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이미 수명을 다한 옛 것을 깨뜨리고 그것에 대신할 만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이 사상에 의해 연결된 정치세력으로서 개화파가 등장했다.
당시 오경석(吳慶錫)ㆍ유홍기(劉鴻基)ㆍ박규수(朴珪壽) 등에 의하여 나라의 근대적 개혁을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자, 김옥균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郊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으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김옥균 등의 개화사상은 1876년 2월,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 있은 후 일본과의 접촉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기에 걸쳐서 한국 사상계에 이채를 드러냈던 실사구시 학파(실학파)의, 특히 박지원 등 북학파의 흐름과 접합하면서 그 혁신사상으로서의 골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강력한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인 개혁 운동은 그를 따르는 동지들의 지지와 찬성을 얻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리태리커백과사전
세계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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