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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저작시기 2006.12 | 등록일 2006.12.06 한글파일 한컴오피스 (hwp) | 5페이지 | 가격 1,600원

소개글

명성황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을미사변, 외교관계, 평가등을 작성

목차

1.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2.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3. 뛰어난 외교가 명성황후

4. 명성황후는 개화파인가?

5.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5.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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