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남송 후기의 사

저작시기 2005.11 |등록일 2006.11.0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0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남송후기의 사... 자료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목차

■ 남송 후기의 사
▲ 강 기(姜夔)
▲ 오문영(吴文英)
▲ 사달조(史达祖)
▲ 张 炎(장염)
■ 맺음말
※ 참고자료

본문내용

■ 남송 후기의 사

남송이 10여 년의 혼란을 넘긴 뒤에는 금나라에 내분이 일어나 더 이상 송나라를 침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남송은 1141년에 금나라와 화의(和议)를 이루어, 소강(小康)을 유지하는 사이에 남부지방 도시들은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번영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이에 송인들은 조국을 외족에게 빼앗긴 치욕은 잊고 하루하루의 향락을 추구하게 되어 항주(抗州)의 번화는 북송의 변경(汴京)을 능가하게 된다. 이에 다시 사대부들은 나라 걱정은 잊고 연락에 빠지게 되어 사(词)는 노래의 가사로서의 기능이 되살아나 음률과 형식만을 중시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 시기의 사인들을 격률파(挌律派)라 부른다. 또는 고전사파(古典词派)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주방언의 사풍의 부활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음률과 형식에 스스로 얽매어 자신의 개성이나 창의는 발휘하지 못하는 폐단도 보여주게 된다. 옛 사람들이 보여준 규범에 따라 거기에 알맞은 글자를 찾아 넣기만 하면 사(词)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송에 성행한 사(词)가 남송에 들어와 형식화한 끝에 쇠미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책임은 격률파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격률파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강기(姜夔), 사달조(史达祖), 오문영(吴文英)을 비롯하여 장첩(将捷), 주밀(周密), 왕기손(王气孙), 장염(张炎) 같은 이들이 있다.
이청조 후 한동안 부진했던 완약파 진영은 강기와 오문영의 출현으로 그 활기를 되찾았다. 남송 말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완약파 노선을 걸으면서 이 두 사람을 본받았다. 그들 가운데 비교적 명성이 높은 작가로 장염(张炎)과 주밀(周密)을 꼽을 수 있겠다. 주밀은 号(호) 가 草窓(초창)으로 사풍이 오문영과 비슷하였다. 오문영의 호에도 窓(창)자가 들어가 梦窓(몽창)이라 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二窓"이라 불렀다. 한편 후세 사람들은 강기와 장염을 "双白(쌍백)"으로 병칭하였는데 이는 장염의 사 모음집<山中白云>(산중백운)과 강기의 호 白石이 모두 白자와 관련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예술적인 성취에 있어서 남송 후기 호방파 진영에서는 강기나 오문영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
다시 남송이 망해 갈 무렵에는 작가들이 현실에 뜻을 잃고 사의 형식만을 따져 영물사(咏物词)를 많이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더욱 모의(模拟)의 수법을 응용한 것이어서 송사는 이에서 더욱 생기를 잃은 느낌을 갖게 한다.

참고 자료

송사선 -권덕주, 황병국 지음/신아사
송사30수 -유병례 지음/아이필드
황하에 흐르는 명시 -이해원 지음/현학사
중국문학의 이해 -김학주 지음/신아사
논문- 오문영사 석론 -이동향 (1995.01)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