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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 성장, 죽음, 사랑, 그리고 통속의 경계

저작시기 2006.10 |등록일 2006.10.27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4페이지 | 가격 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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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 작품은 신경숙의 작품이 종종 그러하듯이, 본질상 위험하지 않은 관습적인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세계를 , 그녀의 심문 , 그 섬세한 기억의 무늬로 드러냄으로써 숙명의 이미지로 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위한을 제공해준 데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풍금이 있던 자리」(1992)나 『깊은 슬픔』이 또한 그렇지 않았던가.
예를 들어,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작가는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리라 마음 먹게 되는 여자의 마음을 지극히 공교로운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 작가가 여자의 이별 논리로 제시한 것이란,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귐으로써 그의 아내를 , 그의 가정을, 또 궁극적으로는 그 여자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음이다. 또 『깊은 슬픔』의 ‘은서’는, 다소 극단화해서 말한다면, 남의 아내가 된 여자로서 결혼 이전에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한 ‘죄’로 인해, 뒤늦게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죽음은 결혼 제도의 금기를 위반한 대가로 나타날 뿐 죽음 자체에 관한 사유는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도, 이별이 죽음에 값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역시 금기 위반의 대가일 뿐이다.
그렇다면, 신경숙은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든가「그는 언제 오는가」에 와서는 과연 죽음의 시유를 구축하고 있는가. 하지만 거기서 죽음에 관한 독자적인 사유를 판별해내기란 어렵다. 「그는 언제 오는가」만 해도 그중의 많은 것들, 연어나, 자살의 결단, 생의 지속에의 욕구 등이 모두 많은 이들이 흔히 고평하는 만큼은 새롭지 않고 깊지 않다. 이들 작품에서도 독자적인 것은 역시 심문이며, 이미지이며, 냄새이고, 이것들이 ‘아름다운 그늘’을 드리우고, 이것들이, 각기, 또 어울려, 작품의 빛을 더한다. 죽음은 그 빛을 위해 얹힌 장식품과도 같다.
동생은 왜 자살했는가? 죽음이 생을 향한 그녀의 애착을 짓밟았으므로, 이제 그 죽음을 짓밟음으로써 짓밟힘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던가? 그러나 그 같은 표면상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자살은, 그녀의 내적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그리는 작가 신경숙의 내면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세상에 냉소적이었지만 동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부모와 고행의 세계를 떠난 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 사람들과의 섞임을 꿈꾸지 않았지만, 동생은 열정적으로 새로운 생을 꿈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선고를 당하는 이가 동생이 되어야 하는 이유, 그렇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작가 신경숙의 내면의 동기는 과연 무엇일까. 「풍금이 있던 자리」나 『깊은 슬픔』에서의 죽음이 그 어떤 죄의 대가였다면, 「그는 언제 오는가」에서 그것은 과도한 욕망의 죄, 생이 허용하지 않는 것을 꿈꾼 죄의 대가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죽음은 시유되지 않으며, 다만 생의 금기를 위반한 대가로서만 나타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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