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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다산 선생의‘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저작시기 2006.10 |등록일 2006.10.24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2페이지 | 가격 1,300원

소개글

200년 전, 다산 선생의‘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 200여년 전, 다산 선생의‘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 다산 선생이 현재의 우리에게 던진 사유의 화두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차

1. 다산과 그의 일생, 그리고 사상

2.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3. 효(孝)와 독서에 관한 다산의 인식

4.다산에게 있어서의 배움의 궁극적 목적

5. 그의 글 속에 투영되어 있는 교육사상,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역할

6. 맺으며 - 다산을 그리워 하다.

본문내용

1. 다산과 그의 일생, 그리고 사상

다산은 176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 송보이고, 호는 사암, 열수, 다산,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지금까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길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제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뱃길에서 이벽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 년 배다리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윤지충․권상연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참고 자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 정약용 지음. 박석무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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