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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표상의로서의 광개토왕 비문의 발제문

저작시기 2006.01 |등록일 2006.09.11 한글파일한글 (hwp) | 7페이지 | 가격 500원

소개글

2001년 출판된 이성시씨의 <만들어진 고대>, `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 논문의 발제문으로 역사 전공수업의 레포트로 제출했던 글입니다.
논문에 대한 정리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목차

1. 근대적 텍스트로서의 광개토왕 비문
- 논문 본문 내용 발제이므로 세부 순서는 동일합니다.

2. 고구려 텍스트로서의 광개토왕 비문
- 논문 본문 내용 발제이므로 세부 순서는 동일합니다.

3. 결론

본문내용

비는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위해 건립한 것으로 비를 세운 장수왕의 의도와 근대 동아시아 각국의 비문에 대한 해석과 평가와는 차이가 있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동아시아의 유동적인 국제 관계, 고구려의 이민족 지매, 수묘인 체제, 고유법 등 여러 가지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광개토왕 비문은 실로 5세기 고구려 문화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텍스트로서의 광개토왕 비문

비문의 주인공인 광개토왕과 함께 그의 아들인 장수왕(391~491) 시기에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장수왕이 광개토왕 사후 3년 상을 지낸 뒤 아버지의 유해를 능묘에 매장하고 그 옆에 건립한 것이 광개토왕 비문이다. 이후 고구려 멸망(668) 후부터 1000년이 넘도록 텍스트로서 주목받은 적이 없이 1880년에 지린성 집안시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6.4m, 한 변의 길이가 135에서 200년에 이르는 네모 기둥모양을 하고 있으며 비의 네 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한문으로 쓰여진 1775자 전문은 서론과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본론으로 구성되었다. 서론은 시조인 추모왕이 건국 창업한 본론으로 시조인 추모왕 이래의 고구려 왕가의 세계를 약술하고 본론에서는 제 2에 광개토 왕릉의 수묘인 330가의 내역과 그들에 대한 금령과 벌칙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본론 제 1단의 무훈시가 중에 8행과 9행에 이르는 32자의 기록 百濟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波(海)破百殘(東)□新羅以爲臣民
“백잔(백제를 낮춰 부른 말)과 신라는 옛날에는 우리의 속민이었고 그전부터 조공을 바쳐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백잔의 꾀임으로 도래하자 백잔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신라를 구원하여 신민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둘러싸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참고 자료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삼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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