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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시대 정치에 대하여

저작시기 2006.09 |등록일 2006.09.10 한글파일한글 (hwp) | 6페이지 | 가격 1,200원

소개글

정조 시대 정치에 대하여 당시의 정치상황과 정조시대 정치에 대하여 재조명해 보았습니다.수원성의 축조의미에 대하여도 언급하였고요
많은 참고바랍니다.

목차

Ⅰ. 정조 시대 전 정치상황
1. 정조 시대 전 정치사
1) 숙종․경종 대 당쟁
2) 영조 대 당쟁
3) 사도세자 흉사 사건
Ⅱ. 정조 시대의 정치
1. 당시의 정치상황
2. 수원성 축성의 정치적 의미
1) 수원화성
2) 수원성 축성의 의미
Ⅲ. 정조 시대 정치에 대한 재평가

본문내용

Ⅰ. 정조 시대 전 정치상황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란 이후 조선 후기 사회는 밖으로 명․청 교체로 말미암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안으로 사회․경제적인 급속한 변동 속에서 국가재건과 민생회복,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룩해야만 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앞장서서 이와 같은 시대변화의 추이와 상황전개 부응하는 현실론적 개혁을 선도해서 추진해야 할 당시 정치계는, 전쟁 전의 동서당론을 그대로 물려받아 보다 심각한 서․남 내지 노․소․남, 노․소 간의 당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 당쟁은 양란 후 인조․효종․현종․숙종 때인 17세기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18세기를 맞이하면서도 노․소로 좁혀진 당쟁은 노론일당전제화와 그를 이은 시벽의 분립을 가져오는 경종․영조․정조 대로 이어진다.

1. 정조 시대 전 정치사
1) 숙종․경종 대 당쟁
18세기에 들어선 노․소 당쟁은 보다 격심한 양상을 연출하면서 노론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쟁론은 경종 및 영조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충역의리론이었다. 그 기미는 이미 숙종 대에 경종이 원자로 책봉될 때부터 발단되었다. 이때 노․소 측은 ‘원자가 남인계와 연관되는 장희빈의 소산인데다 신분도 역관(중인) 집안에서 나왔으므로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정치적 재기에 고투하던 남인을 끌어들여 이를 반대하는 서인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나아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사사시키고 노론가문의 인현왕후까지 폐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노론측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재집권하고 희빈 장씨를 끝내 사사시키는 데 가담하고 세자에 대하여 냉담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반하여 소론 측은 희빈 장씨의 소생이 일단 세자로 확정된 후에는 그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였고 세자를 위하여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모해죄로 역률로 몰리어 죽게 되는 것까지 구하려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척신과 결탁하여 집권기반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경종이 즉위할 때까지 노론 정국이 유지되었다. 나아가 노론은 그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모제인 연잉군을 경종 즉위 초에 서둘러 세자로 책봉케 하고 곧이어 대리청정의 단행을 기도하였다. 소론은 이를 빌미로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집권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의 노론 4대신 이하 노론집권자들이 경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으로 간주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켜 이들을 살육하고 소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유질무사하여 책봉된 연잉군의 세제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았다.

2) 영조 대 당쟁
그 후 경종이 4년만에 죽고 세제 영조가 노론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즉위하여 정국은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영조는 자기의 왕위 계승에 공이 있는 노론의 집권은 당연하지만 신임사화와 같은 살육의 보복은 막아야만 불안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신임사화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완소파 소론의 계열을 중심으로 탕평책을 시행하며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파붕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둥장을 꺼려하여 노소파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나아가 노론은 경종과 관련되어 있었던 일체의 정치적인 명분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그 대신 노론이 영조와 관련되어 있었던 모든 정치적인 명분을 충의로 정립하여 소론은 의리론상 완전히 입지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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