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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회와 통일

저작시기 2006.08 |등록일 2006.08.01 한글파일한글 (hwp) | 46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한국전쟁의 순서별, 원인별로 분석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구한말과 민주주의 이념의 등장: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2. 공산주의의 수용
3. 식민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4. 민족협동전선의 결성: 신간회
6. 김일성과 항일무장투쟁

본문내용

신탁통치안,


전시에 구체화시키지 못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의 전후처리 문제 등을 의논하기 위해 미영소 3국의 외무부 장관들이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한국의 신탁통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소련은 선탁치 후정부수립을 주장한 미국의 안을 거부하고 선임시정부수립 후후견을 내용으로 하는 안을 내놓았다. 미국은 쉽게 이 제의에 응하였으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이 12월 28일 발표되었다.


1.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
2. 임시정부구성을 돕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원회 설립
3. 한국민주임시정부와 민주단체들의 참여 아래, 한국의 민족적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협력 원조(신탁통치)할 수 있는 방책을 작성하는 것이 공동위원회의 임무이다.
공위의 제안은 한국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친 후 최고5개년의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체결을 위한 미소영중의 공동심의에 회부될 것이다.
4. 2주 이내 미소 사령부간의 긴급회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결정은 `5년이내의 4개국 탁치`를 규정한 것으로 말해지지만 그러나 이 탁치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겨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양국의 협조관계의 유지는 탁치안의 실현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하는 과제였다. 양국은 탁치에 인식에 있어서도 미국의 경우는 탁치에 참여하는 미영중소 4대국의 피탁치국에 대한 관계를 `지배관계 훈련시키는 관계` 정도로 이해하였다면 소련은 `후원하고 독립을 원조`하는 관계 정도로 이해함으로써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양국은 한국에서의 탁치가 그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였고 그러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국내 세력들을 원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들 국내 세력들 사이의 탁치 문제를 반대하고 나올 때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탁치를 계속적으로 고집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난관을 넘어 미소가 우호협력관계를 가질 이유가 이미 상실되었다. 전쟁 당시의 공동의 적은 이미 패퇴되었으며 남은 것은 전후의 질서를 어떻게 수립하며 패권을 누가 장악하는가에 대한 갈등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탁치거부였다. 한국인들은 충분히 독립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었고 탁치가 새로운 식민지시대를 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김구는 즉각적으로 반탁을 표명하였다. (미군정의 행정기구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르도록 요구하는 임정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미군정을 대채하여 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는 김구를 불러 위협하였으며 임정의 이러한 시도는 별다른 호응없이 무산되었다.) 한민당과 이승만의 추종세력들도 반탁을 주장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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