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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청계천답사기

저작시기 2006.08 |등록일 2006.07.31 한글파일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3,000원

소개글

청계천을 다녀와서 작성한 답사기입니다.
글자크기10 문단간격160이며 사진자료도 첨부하였습니다.
직접작성하였으며 성적은 A+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차

Ⅰ.청계천
-청계천의 역사
-청계천 복원사업
1.사업개요
2.추진경과
3.추진실적 (공정 100%, 2005. 9. 30 현재)
4.소요예산
5.사업의 타당성
6.사업의 당위성
-청계천 관광
1.청계광장
2.광통교
3.패션광장(문화의 벽)
4.청계천 빨래터
5.소망의 벽
6.존치교각과 터널분수
7.청계천 문화관
8.오간수문터

Ⅱ.광장시장
-광장시장 개관
-광장시장의 역사 (1904~)
-광장시장의 현재모습

Ⅲ.답사후기

본문내용

Ⅰ.청계천
-청계천의 역사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으로 서울의 서북쪽에 위치한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기슭, 남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도성 안 중앙에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연장 10.92km의 도시 하천이다. 청계천 유역은 총 면적 50.96㎢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1394년 서울이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도성 안을 지리적으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도 구분하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작용했다.
도성 내에 있었던 청계천은 주민 생활에 위해 요인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컸는데, 무엇보다 하천의 범람이 문제였다. 1407년 서울의 하천이 범람, 근본적인 조치를 위해 1411년 11월 개거도감(후에 개천도감으로 이름이 바뀜)을 설치하고 52,800명의 인원을 동원한 대규모 개천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때의 공사는 일부 구간의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는 한편 돌과 나무로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개천 역사가 종결된 후 개천도감은 그대로 행랑조성도감이 되었다. 이후 세종 때에는 도성의 개수와 방수, 방화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수성금화도감이 설치되었고 성종 때에는 개천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수해에 대비했다.
한편 개천은 최적의 자연적인 하수도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 그 용도를 둘러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대에 개천의 용도는 하수도로 낙착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인구의 증가와 자연재해 빈발이라는 상황에서 개천이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울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여 하수량 자체가 늘어났고 백악과 남산 일대의 수목이 땔감용으로 남벌되고 일부가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토사의 유입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영조 때에는 준천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영조는 1760년 2월 20만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를 시작하였다. 준천사업은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에 석축을 쌓는 행태로 진행되었다. 이후 준천은 정부의 재정 곤란 속에서도 2~3년마다 한번씩 정례적으로 실시되어 1908년까지 지속되었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마지막 준설이 시행된 후 1918년까지 10여 년간 준천은 한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일제가 청계천을 악의적으로 방치했다가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지배의 중추를 과거 조선과 대한제국의 중심부로 이전할 준비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면서부터였다. 1918년 25만 여 원의 경비를 들여 비로소 준천에 착수한 것은 `경성`의 하수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능적 의미 외에 조선 지배의 중추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 둔다는 의미도 갖는 것이었다. 이후 청계천 준설공사는 수시로 시행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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