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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신돌석과 최익현의 의병활동 비교

저작시기 2006.07 |등록일 2006.07.26 한글파일한글 (hwp) | 16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일제 시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신돌석과 최익현에 대해 조사한 리포트입니다..
두 인물의 활동과 아울러 의병활동에 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목차

머리말

본론
1. 시대적 배경과 의병 운동의 전개
2. 의병장 신돌석
3. 의병장 최익현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이즈음 세력 만회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공사관과 일본인 거류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이 해 5월 7일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그리하여 민씨정권의 원병 요청으로 5월 5일 이미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던 청나라와 일제의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후 일제는 성환전투와 평양전투 등에서 청군을 연파하여 청나라 세력을 한국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3월 23일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으로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일전쟁을 끝냈다. 이 조약에서 일제는 청나라에게 `조선국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시킴으로써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일제는 개항 이후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청나라와 벌여오던 각축전에서 일단 승리할 수 있었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전개되어 가자 일본군의 경복궁 쿠데타로 실각한 민씨정권의 핵심인 명성황후(明成皇后)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제를 견제함으로써 재집권의 기회를 노렸다. 즉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상한 것이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매개로 진행된 이 계획에 크게 당황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였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요동반도의 할양권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비등하였는데, 한국에서조차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날이면 정부의 붕괴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계획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었다. 근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이 만행은 우리 민족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럼에도 일제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8도를 23부로 바꾼 뒤 친일파들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고, 양력 사용과 단발령을 강요하면서 우리나라를 반(半)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의병활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하 에서는 한 말기 대표적인 의병운동가인 신돌석과 최익현에 대한 의병활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참고 자료

김희곤, 2001,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19, 한국현대사학회
조동걸, 2001, 「광무농민 운동과 신돌석 의병」, <<한국근현대사연구>>19, 한국현대사학회
이태룡, 1992, 「최익현의 순창의병과 유소 연구」, <<배달말>>17, 배달말학회
조동걸, 1989, 『한말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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