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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경운궁(덕수궁)의 역사, 건축당시, 전각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7.12 한글파일한글 (hwp) | 30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경운궁의 역사, 우리나라 다른궁과 다른점, 경운궁의 전각
건축될 당시의 상황 등등 책에서 본 자료를 정리하였습니다.
한국고궁에 관한 레포트 제출시 아주 좋은 자료가 될듯 합니다.

목차

서론
경운궁의 역사
경운궁의 소개
본론
주제 : 경운궁의 건축 일대기
경운궁의 전각 소개
결론

본문내용

서론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궁궐에 대한 관심은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등에 편중되어 왔다. 서울의 5대 궁궐에 속해있었던 경희궁은 그 흔적이 거의 없어졌으며 경운궁은 축소되고 변모되어 옛 보습을 잃었고 그 이름마저 덕수궁으로 바뀌어 하나의 별궁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운궁은 우리의 독자적인 관영 공사 체제로 조영된 조선왕조 마지막 궁궐이다. 그러므로 이 궁궐은 현재와 쉽게 연결되며 우리 전총적인 건축 기술자 내지 하도급 일을 맡았던 기술자 집단의 계보와 초보적인 건축 자재상의 성장과정을 추적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경운궁은 당시 우리의 국력이 총동원되어 경영된 궁궐이라 할 수 있다. 고중을 비롯한 당시 이 궁궐의 중건을 계획한 당국자들은 태조 이래 역대의 유지를 계승하며 쓰러져 가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서 또한 왕실의 존엄성과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이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성취하려는 여론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때 국내에서는 일본 침략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 힘입어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밀파하여 일본의 야심을 세계의 여론에 고발하고자 했으며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경운궁의 중건을 결심하였을 것이다.
경운궁에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건축 자재와 그때까지 축적된 우리나라 전통적 건축 기술이 총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추녀, 대들보 등의 큰 목재를 조사하고 구하기 위하여 전라남도의 완도, 경상남도의 동래 등에 이르기 까지 노자를 주어 도편수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 밖의 건축 자재를 조달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특산품을 거두고자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많은 협력을 하였다.
공사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였으므로 기술자의 동원에는 강제성이 수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각 하부 관청의 공사와 사사로운 공역을 중지시켰으며, 각 관청에 등록된 기술자를 먼저 공사에 배속시키고 나머지는 관권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전에 설치되었던 도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장인들이 거의 모여든 것으로 보아 이 일에는 일류 기술자들이 거의 동원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위정자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봉건적 관습을 벗지 못한 나라를 개화시켜야 하는 이율 배반적인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여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하여 우리나라와 전통을 지키려는 국수적인 성향이 우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경운궁의 석조전은 우리 위정자들에 의해 계획되고 건축되었다는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중화전이 우리 민족 세력을 상징하는 건축임에 반하여 석조전은 외국 침략 세력을 과시하는 건축이며 경운궁의 중건도감에서 주관하여 지은 건축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경운궁이 석조전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보존되고 있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부터 불과 백년도 되지 않은 과거의 사실이 망각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경운궁의 일부였던 경기여자고등학교 자리를 미국대사관 요지로 양도함으로써 이 궁궐을 복원하는 일이 불가능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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