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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강화도 고려궁지 답사지

저작시기 2006.04 |등록일 2006.07.02 한글파일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강화도 고려궁지의 답사지입니다. 답사갈 계획이라면 읽어보는것도 좋을듯하네요~

목차

1.강화도 고려궁지의 설립배경
2.몽고족과의 전쟁
3.개경과 강화도의 고려궁지
4.나라를 위한 천도인가? 정권유지를 위한 천도인가?
5.항몽무대 복원작업

본문내용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시대 궁궐터로써 고려는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제2차 침입 직적에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1270년(원종11)에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이곳을 궁궐로 사용하였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당시 최고 실력자인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지었다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을 비롯해 행궁, 이궁, 가궐등 많은 궁궐이 있었고 정문으로 승평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년(인종9) 이곳의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병인양요로 전각, 강화유수부, 규장외각 등이 소실되고 현재 관아 건물인 명위헌, 이방청등이 남아있다.

1.강화도 고려궁지의 설립 배경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금나라를 정벌하자 거란족은 고려의 영토로 밀려오게 되는데, 이에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을 멸하였는데 이를 ‘강동의 역’이라고 한다. 그 후 몽고는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고, 특히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의 오만한 태도는 많은 고려인들의 분노를 샀는데, 돌아가던 저고여가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계기로 몽고의 침략이 시작된다. 고려군은 몽고의 침입에 항전했으나 수도 개경이 포위되어 몽고와 화의를 맺게 된다. 몽고는 여전히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며 북방지역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는 해전에 약한 몽고의 약점을 노리고 1232년 몽고와 끝까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2.몽고족과의 전쟁
최우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항몽 태도를 분명히 하자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단행하여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준후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서 몽고군은 계속해서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에 걸쳐 몽고군의 침략이 되풀이 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여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강화도 미래 신화의 원형/이동연/푸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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