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한국중세사]고려의 서경

저작시기 2005.10 |등록일 2006.06.30 한글파일한글 (hwp) | 10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고려시대 서경에 대한 글이다.
태조부터 시작한 서경 경영에 대해 기술하였다.

목차

머리말

1. 고려의 서경제도
(1)태조의 서경경영
(2)태조 이후의 서경경영
2. 서경의 성곽과 궁궐
(1)서경의 도성과 나성
(2)서경의 궁궐
3. 서경의 사원
(1)서경의 사원
(2)서경의 불교신앙

본문내용

머리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三京제도로 인하여 새로운 도시로서 숨을 쉬게 되었다. 그 당시 평양은 황폐화 되었고 여진인의 침입이 빈번하여 태조는 평양에 관심을 두어 평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정도의 일로 말미암아 평양을 3경의 하나로 격상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3경의 하나가 되어 새로운 번영을 누리게 된 서경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고려의 서경제도
왕건의 평양에 대한 관심은 태조원년(918년)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에 보면 “태조 원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고 당제(사촌 동생) 식렴(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 평양을 수비하게 하였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개경으로의 천도보다 4개월 전의 일로 이로써 왕건의 서경에 대한 관심을 알아볼 수 있다.

(1) 태조의 서경경영
왕건이 즉위한 이후 평양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앞에 나온 고려사 918년 조와 같이 국토의 북방으로서의 여진족등의 오랑캐에 대한 국방상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양을 서경으로 승격시진 정책에서는 국방상의 이유만 보면 너무 과도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뒤에 경주에는 신라의 잔존세력이 있었고 후백제의 古土에서도 백제의 부흥을 열망하는 후백제세력이 팽배하고 있어서 남부로는 세력 확장을 하기가 극히 어려워 북방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언제부터 서경으로 승격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록에 ‘서경’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인 것은 921년(태조 4년) 10월이었다. 이러한 명칭의 변경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 부과된 것으로 보아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왕건에게 시급한 문제는 국내 호족들에게 세력을 견제하고 아울러 왕권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고려사』
김창현, 김철웅, 이정란 『고려 500년 의문과 진실』 2001 김영사
하현강 <고려서경고> 1967
김창현 <고려 서경의 성곽과 궁궐> 2001
김창현 <고려 서경의 사원과 불교신앙> 2005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