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한국사]고려시대의 농업

저작시기 2006.06 |등록일 2006.06.30 한글파일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고려시대의 농업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머리말
2.농업의 발전
1)경지 이용법
2)농기구의 발전
3)수리관개 기술의 발전
4)경지의 개간
5)시비기술의 발전
6)신품종 벼의 도입
7)도작기술의 발전
8)농학의 발달
3.맺음말

본문내용

(1)고려 이전설
먼저 고려시기 이전에 이미 경지의 상경화(常耕化)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중에서 상경화의 시기를 가장 올려잡는 것으로는 5~6세기경에 이미 휴한법이 극복되고 상겹화가 이루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이성혜, 1995 「한국 농업기술 발전의 諸時期」 『한국사 시대구분론』 소화
상한(上限) 시기를 5~6세기로 잡는 이유를 종래의 노예제적 생산관계는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로 변화하는데 그 배경에는 농업생산력의 커다란 증대, 즉 휴한법의 극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실증이 미역하고 논리전개에 비약이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통일신라기에 이미 수전(水田)은 물론 산지의 한전(旱田)을 제외한 평지의 한전까지도 상경화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김용섭, 1975 「고려시기의 양전제」 『동방학지』 16
심경(深耕)의 실시를 이유로 연작법(連作法)이 성립한다고 볼 수 없으며, 또 신라 촌락문서에서 호당 전답 결수가 후대에 비해 과도하게 많다는 점이 이 시기에 상경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이다.
다음은 나말여초를 휴한법에서 상경법으로 이행하는 시기로 보는 견해이다. 위은숙, 1985 「나말여초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 주도세력」 『부대사학』 9
이는 사료해석에서부터 상반된 견해가 있으며, 해석의 차이에 따라 그 결과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 시비기술의 근거로 이용한 사료도 지나친 추측을 하였다. 그리고 나말여초 시기 선승(禪僧)과 호족(豪族)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선승은 중국유학을 통해 중국의 선진농법을 받아들여 왔고, 호족은 촌락 내에서 농업생산에 유리한 위치에서 생산력 발전을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급에 상당한 세월을 요하는 농업기술이 별 시차 없이 곧바로 신라사회에 전파되어 단기간에 휴한법을 극복하고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2)여말 선초설
고려시대에는 휴한법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으며, 상경법은 여마선초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시대 경지의 대부분은 1년 휴한하는 토지로 보기 때문이다. 휴한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잡초를 제거하고 경지에 비료를 주는 기술이 발달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 후 고려시대에 상경법이 달성되는 것은 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수입되면서부터라고 보았다. 중국에서는 당말오대 이후 시비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특히 강남지역에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강남농법을 고려 말 새로운 사회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신흥사족(新興士族)이 새로운 지배이념인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함께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중국에서는 당말오대(唐末五代)에 개발되어 보편화된 강남농법이 500여 년이라는 긴 시차를 두고 고려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려 농법의 발전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고 이해할 때 고려의 농법을 지나치게 후진적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4권, 국사편찬위원회,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9권, 국사편찬위원회, 1996
권영국, 「고려시대 농업생산력 연구사 검토」, 『한국중세사 제조명』, 신서원, 2001
위은숙, 『고려후기 농업경제연구』, 혜안, 1998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