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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창덕궁에 대하여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6.22 한글파일한글 (hwp) | 22페이지 | 가격 2,000원

소개글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기술하였습니다.
직접 촬영한 사진을 수록하여 알아보기 쉽고, 창덕궁내의 여러 건물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하고 있습니다.
좋은 참고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1. 창덕궁의 역사
1) 서울의 5대 궁궐과 창덕궁
2) 조선전기의 창덕궁
3) 17-19세기 창덕궁
4) 20세기 창덕궁
2. 창덕궁의 배치와 특징
3. 창덕궁의 전당들
1) 돈화문
2) 금천교
3) 인정문
4) 인정전
5) 선정전
6) 희정당
7) 대조전
8) 구 선원전
9) 내의원과 성정각
10) 낙선재
11) 어차고
4. 창덕궁의 후원
1) 부용정과 부용지
2) 영화당
3) 주합루
4) 기오헌과 의두각, 불로문, 애련정
5) 연경당
6) 존덕정, 관람정
7) 옥류천 일대

본문내용

1. 창덕궁의 역사
1) 서울의 5대 궁궐과 창덕궁
창덕궁은 태종(太宗)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이궁(離宮)으로 삼기 위해 건립한 궁이다. 태종 5년(1405)에 건립된 궁은 이후 태종의 재위 13년 동안 계속해서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궁궐로써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관 출신의 박자청(朴子靑)이 공사감독을 도맡아 하였다.
조선시대 왕궁은 큰 곳만 다섯 군데가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그것이다. 이들 궁전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곳은 경복궁이다. 조선왕조 창업주인 태조가 지었으며, 궁궐 가운데 규모도 가장 크다. 또한 경복궁을 중심축으로 종묘와 사직이 배치되고, 한양이라는 도시가 설계되었다. 그래서 경복궁을 법궁(法宮) 혹은 정궐(政闕)이라 불렀고, 나머지는 이궁 혹은 별궁(別宮)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실제로 가장 오래 머문 정치·생활 공간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과 그에 가까운 창경궁이었다. 경복궁은 선조(宣祖) 25년(1592)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없어졌다가 고종 5년(1868) 다시 복구되어 1896년 아관파천 이전까지 왕궁으로 쓰였다. 따라서 이곳은 조선 전기 197년, 그리고 근대 28년, 도합 225년의 역사를 지닐 뿐이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1910년까지 505년의 역사를 지녔고, 창경궁은 426년의 역사를 누렸으니, 이 두 궁이 가장 오랜 정치·생활 공간이 된 셈이다.

2) 조선 전기의 창덕궁
초창기의 창덕궁은 외전(外殿) 74칸, 내전(內殿) 118칸이었다. 이 규모는 지금의 규모보다 작은 것이다. 이는 정전이나 편전, 침전 등 꼭 필요한 중요 시설만을 갖춘 불완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대한건축사협회, 『한국전통건축 제 2권 창덕궁』, 1994.

1차 궁궐의 조성이 끝난 뒤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태종 6년에 광연루(廣延樓)가 이룩되고 태종 11년(1411)에는 진선문(進善門)과 금천교(錦川橋)가 세워지고, 12년에는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건립된다.
그리고 태종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을 다시 짓게 하여 준공된 지 10여 년 뒤인 태종 18년(1408), 곧 세종 즉위년 9월에 완성된다. 세종은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즉위하고서는 바로 수리중인 창덕궁으로 옮기고 인정전이 완성된 뒤에는 창덕궁 안에 집현전, 장서각 등을 새로 건립한다.

참고 자료

대한건축사협회, 『한국전통건축 제 2권 창덕궁』, 1994.
신영훈, 『서울의 궁궐』, 조선일보사 월간조선, 1997.
장순용, 『빛깔있는 책들 - 창덕궁』, 대원사, 1990.
장경호 외, 『한국의 고궁 ② 창덕궁』, 열화당, 1986.
김동현,『서울의 궁궐 건축』, 시공사, 2002.
이덕수,『신 궁궐기행』, 대원사, 2003.
한영우,『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 2003.
이강근,『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이기웅『한국의 고궁 건축』, 열화당,1988
홍순민,『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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