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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광개토 대왕릉비의 검토

저작시기 2006.04 |등록일 2006.06.21 한글파일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1,500원

소개글

거의 완벽한 레포트에요^-^;ㅎㅎ 정말 많은 자료 보고 완전히 읽고 해서 썼습니다.

목차

Ⅰ. 서론

II. 본론
1. 개관과 재발견 경위
1)개관
2)능비의 재발견
2. 비문의 구성과 내용
3. 비문과 관련된 논쟁
1) 신묘년 기사 논쟁
(1) 일본학계의 주장
(2) 한국학계이 주장
(3) 비문 개작설
(4) 전치문설.
2) 고구려 천하관과 倭의 실체에 관한 논쟁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고구려, 백제, 신라 각 삼국이 병립하면서 각 국가는 전성기가 있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 전성기를 이루고 이것을 발판으로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우리는 특히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때로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고구려는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한 나라이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의 위상이 대단한 나라여서 얼마 전 발행이 논의된 고액권 화폐의 모델로 광개토왕이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위상이 대단했던 그토록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최전성기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말해주고 있는 증거는 이야기 한다면, 단연 광개토왕릉비가 될 것이다. 실로 이것은 고대사 연구에 있어 제 1급의 금석문 자료이다. 이제부터 아래에서 광개토왕릉비의 개관과 재발견 경위, 구성과 내용, 비문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Ⅱ. 본론
1. 개관과 재발견 경위
1)개관
광개토 왕릉비는 고구려의 발전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열어놓은 광개토왕(재위 391-412)의 공훈을 찬양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능비는 옛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오늘의 중국 길림성 집안)의 동쪽 언덕에 서 있다. 우리의 실측에 의하면 이 비는 높이가 6.34m, 4면이 각각 1.43-1.90m나 되는 거대한 4각주의 응회암 통돌로 된 것인데 과거 이러한 유형의 비로서는 실로 최고인 것이다. 이것은 광개토왕이 죽은 다음해인 414년에 왕릉축조와 함께 그 부근에 세워진 것이다.
또 그것은 비신의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는 사면환각비인데, 대체로 5.5m 높이에서부터 비문을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면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cm간격으로 가는 종선을 그었다. 여기에 한(漢)의 예서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0-15cm 정도 크기의 모두 44행 175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어 중원고구려비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사료로 평가된다.

참고 자료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사회과학원, 중심, 2001
<아! 그렇구나 우리역사>, 여호규 글, 고래실, 2003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역사비평사, 2002
<고구려 광개토왕릉 비문연구>, 이도학, 서경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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