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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이정기 왕국 - 중국 속의 또다른 고구려

저작시기 2005.04 |등록일 2006.06.11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4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세계제국인 당(唐)의 심장부 산동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왕국을 세운 뒤 4대에 걸쳐 55년 동안 당 조정과 대립했던 이정기(李正己) 장군에 관한 고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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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계제국인 당(唐)의 심장부 산동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왕국을 세운 뒤 4대에 걸쳐 55년 동안 당 조정과 대립했던 이정기(李正己) 장군. 이정기는 당의 혼란기에 안록산 반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입신해 당의 최대 강번(强藩)으로 성장한 끝에 직접 당과 대결했다. 그러다 그의 아들인 납(納)은 스스로를 제왕(齊王)으로 칭하면서 당과 당당히 맞서, 한때 덕종(德宗)이 장안을 떠나 섬서성 건현․남정현 등지로 피난하기도 했다.
우리로서는 한민족의 활동 범주를 한 발자국 넓힐 수 있는 역사적 쾌거였지만, 이정기의 활약상은 우리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사대주의 역사서술에 의해 잊혀진 영웅이 되어버린 셈이다. 현대 역사가들마저 그의 치적에 대해서는 필(筆)을 아껴, 그에게 당이라는 세계제국에 대항하다 토벌된 번진(藩鎭)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민족사에서 그에 대한 언급은 고작 일제 통치 때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역사』에서 나타날 뿐이며 오히려 중국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이정기(본명 懷玉)는 영주(營州) 땅에서 고구려가 패망(668년)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태어났다. 당은 고구려유민들을 당의 전국 각지로 분산 이주 시켰는데, 이정기는 그 유민들 중의 일부로 보인다.
그가 처음 역사에 드러난 것은 당의 최대 혼란기로 꼽히는 「안록산의 난」때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안록산 난 당시 반군 토벌에 동원되었던 위글(군의 대장)이 자신의 전공과 완력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정기가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하자 군사들이 이정기를 추종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정기는 당시 영주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군의 비장(裨將)으로 자신과 내외종 사이었던 후희일(侯希逸)과 평로군에서 함께 복무했다.
후희일은 이정기의 고종사촌으로 그보다는 손위였다. 이러한 후희일이 난이 한창일 때,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와 공모해 안록산의 친장(親將)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徐歸道)를 죽이고 왕현지를 평로군사로 옹립한다. 그런 왕현지는 곧 병사하고(758년), 당조정이 그 아들에게 절도사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추대했다.
후희일은 이전부터 반군 합류를 종용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안록산의 사신(使臣)를 참수해버리는 등 철저히 반 안록산 노선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평로군은 안록산 군대로부터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奚族)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761년 부장(副將) 이정기와 함께 후희일은 근왕군(勤王軍) 2만명을 데리고 발해만의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등주(登州)로 상륙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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