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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임칙서와 홍수전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24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6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1. 서 론 : 청조의 쇠퇴기
2. 본 론 : 서양침략과 대내외적 동요
1) 서양인의 중국 무역과 광동체제
2) 광동 무역의 한계
3) 영국 동인도회사와 차(茶)
4) 은의 유출과 아편
5) 이금론과 엄금론의 대립
6) 광동의 풍운아 임칙서
7) 아편전쟁과 남경조약
8) 아편전쟁의 사회적 영향
9) 홍수전과 태평천국 운동
10) 홍수전의 변형된 기독교 사상
11) 태평천국의 실패와 사회에 끼친 영향
12) 태평천국 후기 서양침략(제2차 아편전쟁)
3. 결 론 :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역사적의의
4.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본론 : 서양침략과 대내외적 동요
1. 서양인의 중국무역과 광동체제
청조정부는 서방 각국에 대한 기본적으로 폐관정책을 채택하였으니 즉 대외 무역의 제한정책이다.
폐관정책은 중국의 비교적 안정된 소농 자급자족 농업과 가내수공업이 상호 결합한 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폐관한 것이 아니었고, 내외무역시에는 여전히 외국상인을 후원하려는 의도가 있었으니, 바로 건륭이 영국 황제에게 칙유를 주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산물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어, 예전부터 외국의 화물을 빌어 없는 것을 통하게 하지 않았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 나는 찻잎과 사는 서양 각국과 당신 나라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기에 은혜를 베푼 것이다.”
서양인의 중국에 대한 무역은 마카오를 통하여 이루어져왔다. 특히 청이 중국을 통일하고도 명의 부흥을 꾀하는 세력이 남아있어, 이들과 연해지방을 단절시키기 위하여 해금정책을 폈기 때문에, 무역은 주로 마카오를 거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만을 평정하고 난 다음해인 강희 23년(1684)에 해금정책을 폐지하고 광주, 복주, 영파, 운대산을 개항하고, 각각 월해관, 민해관, 절해관, 강해관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청대이전에 무역을 관장하였던 시박사 제도가 폐지되고 해관이 무역을 관리하게 되었다.
청조가 개관한 이후, 대외무역은 모두 명조의 구제도에 따랐다. 민 ․ 오 각관은 모두 정 ․ 부 감독 한사람씩을 두었는데, 이들은 이전의 시박사에 상당하며 도착한 배는 감독의 조사를 받아 허가된 후에야 비로서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대외 무역의 상인은 ‘행상’, ‘양상’이라고 불렀고, 또 ‘관상’이라고도 했다. 대외무역의 조직은 아행이라고 불렀고, 또 ‘13행’이라고도 했다. 무역의 규정을 통일하기 위하여 강희 59년(1720년)에 또 ‘공행’을 성립하였는데, 공행은 대외무역을 독점하여 다른 상인은 참여할 수가 없었다.

참고 자료

F.웨이크만, 중국제국의 몰락, 예전사, 1987년
진순진, 중국의 역사 2권, 한길사, 1995년
신승하, 중국사, 대한교과서, 1998년
이진복, 김진옥 역, 중국전사 하권, 학민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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