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입력폼

[한국사]호족연합정책에 대해서

저작시기 2006.05 |등록일 2006.05.24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8페이지 | 가격 2,000원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後三國의 성립
2. 高麗王祖의 建國과 統一
3. 高麗 太祖의 豪族聯合政策
⑴ 豪族聯合政權說의 성립
⑵ 高麗 太祖의 對內政策
ⅰ. 通婚政策
ⅱ. 賜姓政策
ⅲ. 事審官制度
ⅳ. 其人制度
ⅴ. 徇軍部와 廣評省
⑶ 豪族聯合政權說의 비판
⑷ 豪族聯合政權說에 대한 최근의 견해
Ⅲ. 結論

본문내용

Ⅰ. 序論
호족은 신라말부터 고려 때까지 정치세력으로써 정치․사회 모든 방면에서 주도해나간 세력이었다. 이들이 고려라는 새로운 국가를 이끌고 나아가는 지배세력으로써 발전되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고려가 건국되기 이전의 당시 상황과 고려 건국과 통일, 고려라는 국가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첫 번째 왕, 태조가 지배세력인 호족들을 어떻게 융합해 나아갔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이어서 호족 연합 정권설의 비판과 최근의 이 학설의 견해에 대해서 考察해보고자 한다.

Ⅱ. 本論
1. 後三國의 성립
신라 말의 농민항쟁은 이미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가운데 각지에서 호족이 자립해있던 현실 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따라서 호족들 가운데 일부는 이들 초적 내지 산적들을 소탕한다는 관군의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세력 확대를 도모코자 하기도 했다. 궁예가 전자의 경우라면 견훤은 후자의 경우에 넣을 수 있다. 견훤과 궁예는 농민항쟁의 전개과정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정권을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들은 각각 다른 호족세력에 비해 강력한 군사적 기반을 확보하여 독자적으로 영역을 지배한 다음, 견훤은 진성여왕 8년(892)에 완산주를 거점으로 하여 후백제를 세웠으며, 궁예는 진성여왕(894)에 溟州를 점령하고 浿西의 세력을 흡수하여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 신라와 鼎立하여 後三國時代가 열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원래 상주지방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는 신라의 군대에 들어가 서남 방면의 방위에 공을 세워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견훤은 완산주를 점령한 다음 義慈王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아래 후백제를 건국한다. 그 후에 그는 서남지방 각지의 호응을 얻어 전라도,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는 효공왕 4년(900)에 정식으로 후백제 왕이라 칭하면서 관직을 설치하여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견훤이 신라의 서남지역을 근거로 후백제를 건국할 무렵 북쪽 지역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자 하고 있었다. 효공왕 5년(901)에 이르러 명주로부터 패서 일대의 지역을 차지하게 되자 드디어 그는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으나, 景門王 즉위 이후 야기된 정권다툼에서 희생되어 지방으로 밀려난 왕족으로써 버림받은 그는 승려생활을 한 다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북원의 양길에게 의탁하여 奈城, 溟洲 등 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는데 앞장섰다가 곧 양길을 치고 북방의 주인이 되었다. 효공왕 8년(904)에 이르러 궁예는 국호를 摩震이라 고치고 신라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廣評省을 최고 관부로 하며 兵部, 大龍部, 內奉省 등 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正匡, 元輔, 大相 등의 독자적인 것을 마련하였다. 이듬해에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효공왕 15년에는 泰封이라고 국호를 바꾸었다.

참고 자료

基白 著, 『高麗 貴族社會의 形成』, 서울 : 一潮閣, 1990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 서울 : 국사펀찬위원회, 1990
최규성,
다운로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