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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10월 민중항쟁과 제주 4.3항쟁

저작시기 2006.04 |등록일 2006.05.23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11페이지 | 가격 1,300원

소개글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 4.3항쟁에 대해
원인과 전개 결말까지를 정리했습니다.

목차

해방정국(특히 남한)의 일반적 상황
경북지역 10월 항쟁의 배경
경북지역 10월 항쟁의 전개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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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4.3항쟁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사회적 배경◀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었으나 제주도의 일본군이 철수 한 것은 68일이 지난 1945년 10월 23일부터였다. 제주도는 완전한 해방을 맞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조직 경험과 방법을 토대로 자치적인 치안조직 및 행정, 경제조직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우선 도민을 방어하기 위한 자위기관으로서의 청년대나 보위대를 편성하였고, 학교, 기업체 등은 도민들의 손으로 접수, 관리, 운영하였다. 이를 모태로 1945년 9월 10일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가 결성되었다. 이후 건준의 발전적 해체로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하여 실질적인 군정업무를 담당할 제59군정대가 실시한 것은 포고령 제1호에 따라 붕괴된 일제통치기구를 재수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미군정은 46년 8월 1일 제주도를 도(道)로 승격하면서 우익의 입지를 넓혀주었고, 동시에 인민위원회의 해체를 위해 좌익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갈등 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8.15당시 제주도는 본토에 비해 소작농의 비율이 작았고, 농민 대부분이 자영농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대부분의 농지가 밭이었고, 토지 생산성이 매우 낮아 절대적 빈곤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계속된 흉년과 일제시기 이주했던 도민들이 대거 귀환하면서 도민의 실업률이 급증하게 되었다. 또한 도제가 실시된 이후, 도제승격에 따른 각종 부담잡세가 신설, 증가하여 도민의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이런 와중에 실시된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은 도민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한편, 도제(道制)실시 이후 군정 당국은 강화된 물리력을 이용하여 인민위원회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1946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정과 좌익의 대립정도는 육지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덜한 편이었다.

참고 자료

논문과 정해구 선생님의 10월항쟁 연구, 그리고 제주 4.3 진상규명 명예회복 위원회에서 발간한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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